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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칼럼

농부의 행복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입력 2026.01.22 13:07 수정 2026.01.22 01:07

유인봉 시인 / 수필가

상강을 기다리기에는 마음이 급했는지 이른 무서리가 내리고 된서리도 두어 차례 내렸다. 수롱골 뒤로 오르는 봉화산에도 불그스레 한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다. 솔뫼로 넘어가는 매봉재 은행나무에 노랑물감이 번지고 있다. 고춧잎도 된서리를 맞아서인지 불을 맞은 듯 까맣게 변하며 처진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다. 듬성듬성 미처 주인의 손길이 닿지 못한 붉은 고추들이 늦가을 햇살 아래 고춧대에 매달려 있다. 동산 밑 비탈진 고구마 이랑에서 온 가족이 모여 고구마를 캐고 있다.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 며느리까지 고향 집 가을걷이에 나선 모양이다. 엊그제만 해도 금빛으로 일렁거리던 오얏재 들판도 고양선이지나가는길목도휑하니비어있다.콤바인이주야로며칠탈탈거리더니 벌써 벼 베기를 마친 모양이다.
고향은 11월을 전후하여 가을 사과 수확이 정점에 이른다. 간식으로 고구마를 삶고 주섬주섬 작업 도구와 간식을 챙겨 아내와 함께 농장을 향한다. 어느 둔덕이나 골짝마다 사과나무가 풍경처럼 심겨 있다. 가을날의 장수는 붉은 사과로 인해 더욱 풍성해진다. 나무수형은 대부분이 세장 방추형이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아랫부분은 넓고 위로 오를수록 좁아지면서 안정감이 있어 보이는 원통형 수형이다. 일본에서 도입된 작형이란다. 햇빛을 고르게 받고 좁은 면적에 수고를 높이 하여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경제성 있는 수목 형이다.
지난봄 이상기온으로 냉해를 입은 꽃눈이 아픈 상처를 딛고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달았다. 설상가상으로 이상기온과 기상이변으로 역대 최장 장마 기간인 54일의 기나긴 장맛비로 햇빛 부족과 과한 습도로 인한 생육이 아주 어려웠다. 적절한 물과 충분한 햇빛을 통한 탄소동화작용을 통해 땅속의 양분을 흡수하여 지상으로 올려보내야 하는데, 긴 장마로 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사과 생육이 좋지 않다. 거기에 색깔이 드는 시기에 탄저병이 극성을 부리고 긴 장마가 끝나자 불볕더위가 시작되었다. 수분을 많이 머금었던 과일이 뜨거운 햇빛을 받아 꼭지 부분이 갈라지고 터지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한 우여곡절을 겪고도 붉은 결실을 본 나무가 자랑스럽고 대견 스럽다. 잘 견뎌준 나무가 농부에게는 고맙기 그지없을 뿐이다. 비록 작황과 수확량이 전년보다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렇게 수확의 기쁨을 주셨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일 년 농사 중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거두는 일뿐이다. 물론 중간마다 병충해 방제하고 비료와 거름을 주기도 하지만, 싹을 틔우고 잎을 내며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 몫이기 때문이다. 한 해 농사에 풍년을 기대했다가 올가을처럼 손에 쥔 수확이 성이 차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홍수로 또는 수해로 터전이나 목숨을 잃기도 하고 주택이 침수되어 큰 어려움을 당한 이들이 많이 있다. 또한 태풍으로 인해 많은 농작물 피해를 본 지역의 농가들이 부지기수로 있지 않은가? 그 사람들의 어려움이나 상처에 비하면 이 정도의 가을걷이를 허락하신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나무에도 수고했다고 등을 다독거려 준다. 사과에도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노라고 그간의 수고를 위로해 준다. 나무마다 네댓 개씩 까치가 먼저 입맛을 보았는지 콕콕 쪼아놓은 자국이 눈에 띈다.
쪼던 것만 쪼았으면 좋으련만, 하나만 먹어보고 사과 맛을 알 수 있으랴? 이것저것 먹어보아야 제대로 맛을 알 수 있었을 게다. 어차피 흔적이 남아 있는 터이다. 좋은 쪽으로 생각을 둔다. 나무 꼭대기에 남은 사과들, 나무마다 하나씩 남겨두고 가자. 나중에 까치 녀석들에게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이란 말은 듣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높은 사다리에 올라앉아 잠시 휴식을 취해 본다. 사과를 하나 따서 한입베어물자새콤달콤한사과향이입안을가득 채운다. 된서리가 두어 번 내려서인지 사과 향이 한껏 깊다. 나무에서 바로 따 먹는 아삭거림도 사각거리는 소리도 농부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리라. 덕유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화산 둥근 머리가 바로 코앞
이다. 장안산 능선도 푸른 가을 하늘에 맞닿아 더 선명하다.
가을날 산촌의 오후는 농부에게는 너무나 짧다. 오후 4시를 조금 넘겼는데 서산머리에 해가 한 뼘밖에 남지 않았다. 서둘러 사과를 들어내고 일의 끝맺음을 해야 한다. 오늘만 날이 아니다. 내일 해야할 일도 남겨두기로 한다. 지난 추석 명절에 사과 맛이 좋다고 답장을 준 지인들과 고객들 생각이 난다. 나누어 줄 가을 사과도 봉다리 봉다리 챙겨 봐야 하겠다. 가을걷이의 풍성함을 나눌 수 있는 일, 농부만이 오로지 누릴 수 있는 특권 아니겠는가.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집에 돌아오는 운전대가 가볍다. 트로트 한 곡 틀어본다. 그래 농사꾼은 이런 맛에 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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