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열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기나긴 세월을 겪어오며 많은 일화를 남긴 선배들이 계시지만 소석(素石) 이철승선생처럼 굴곡이 심했던 분도 드물다. 일제 강점하 조선 민족의 최대 저항운동이었던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3년 후에 전주에서 태어난 이철승은 전주북중 재학시절에 일본인 교사가 학생들에게 ‘조센진’이라는 멸칭을 사용하자 이에 항의하며 취소를 요구했다. 교사가 이를 거부하며 더 심한 욕설을 퍼붓자 이철승을 선두로 학생들이 일본인 선생을 번쩍 들어 올려 교문 밖으로 던져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학교에서는 즉시 퇴학을 결정했으나 전주의 토호(土豪)와 유림(儒林)들이 들고 일어나 항의하는 통에 1년 무기정학으로 징계가 낮춰졌다. 이 때 동급생 중에 김원용(金源勇)이 있었는데 그의 용모와 체구는 타고난 장군이었다. 그가 4.19 당시 전주경찰서장으로 있었는데 전북대와 전주 각 고교생들의 시위대가 도청에 난입하려 하자 발포하겠다고 경고했다.
데모대가 이를 묵살하고 도청에 진입하며 투석전을 벌였으나 도청 옥상에서 발포 명령을 기다리던 수백 명의 경찰대는 경찰서장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전북대 3학년으로 맨 앞에서 똑똑히 목격했다. 발포를 하지 않은 전주에서는 총탄에 의한 희생자가 없었다. 4.19혁명 과정에서 186명의 희생자와 6천 여명의 부상자가 나왔지만 전주가 무사한 것은 이철승과 함께 일제에 저항했던 김원용의 용기였다고 본다. 그는 그 후 서울에서 택시운전사로 일하고 있다고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으나 병으로 일찍 별세했다는 후문을 들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학교를 마친 이철승은 고창출신 김성수가 세운 고려대에 들어가 때마침 닥친 광복직후의 혼란 속에서도 반탁 반공의 기치를 들고 전국학생총연맹 위원장으로 맹활약한다.
소석이 정치에 입문한 것은 3대국회다. 4대에 연속 당선한 그는 이승만정권의 정치파동과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 무도한 영구집권 획책에 몸을 던져 반항하며 3.15 부정선거로 전 국민이 궐기하는 시위에 국회의원을 동원하여 가담한다. 특히 모교인 고려대생들의 4.18 데모대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농성을 벌이자 유진오총장과 함께 그들 앞에 나섰다. 국회의원 중에서 최고의 민주투사로 알려진 이철승의 등장은 학생을 열광시켰다. 그는 “이제 학생들의 주장은 국회와 정부에 정확하게 전달하겠다. 여러분의 진정은 잘 알았다. 학교로 돌아가 학구에 전진하라”고 격려하며 귀교를 권했다. 고대생들의 귀교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비유된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이정재가 지휘하는 정치깡패의 기습이었다. 청계천4가를 피로 물들인 이 사건은 100여 명의 학생들이 널부러진 대문짝만한 사진이 신문을 장식하며 온 국민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튿날 전국 학생이 총동원된 4.19혁명의 기폭제였다. 이처럼 4.19혁명과 이철승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계가 되었으며 그후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며 소석의 위상은 소장파로서는 드물게 최고의 주목을 받는 정치인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내각책임제로 전환한 정권 최정상에 장면(張勉)이 앉았으나 그의 우유부단한 리더십은 혁명정권에 걸맞지 않았다. 사회는 혼란의 극치를 이뤘으며 심지어 경찰관까지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데모를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학생혁명의 여파는 대한민국을 데모 공화국으로 전락시키는 여파가 되었으며 이는 전적으로 장면 정권이 책임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를 호시탐탐 노리던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 세력이 5.16 군사 쿠데타를 획책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정권을 장악한 사람들의 무능에 기인하는 것이다. 희망과 꿈에 부풀어 올랐던 4.19혁명의 위대한 정신은 군화에 짓밟히고 모두 감옥이나 망명으로 뒷전으로 물러났다. 소석은 미국에 망명하여 6대, 7대국회를 거르며 8년동안 타의에 의한 정치 무자격자가 된다. 군산 출신 양일동의원 역시 일본과 미국을 오고가며 망명의 쓰라림을 같이 한 분이다.
이철승이 망명에서 귀국할 때 모든 신문과 방송은 그를 화려하게 조명했다. 차기 대통령은 이철승 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누구도 그 사실을 부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10월유신을 선포하며 어느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은 완고성으로 일관하며 긴급조치 정치로 야당과 국민의 입을 틀어 막는다. 이철승은 유신에 반대하면서도 정치의 극한 대립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정치의 최후가 무엇을 남길 것인지 고민 끝에 나온 경륜이 중도통합론이다. 이에 대한 찬반 논리는 아예 무시되고 당시의 야당을 주도하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철승을 사쿠라로 몰아 세웠다. 국민의 분위기도 소석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소석이 정치인으로서 오랜 세월 가꿔온 경륜을 제대로 펼칠 사이도 없이 속절없이 유신에 빌붙은 정치인으로 낙인 찍히는 수모를 당한다. 그러나 그 후 양김씨들도 정치의 중도통합론이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이를 주장하게 된 것은 소석의 선견지명을 일께워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지난 2월27일 국립 현충원에서 소석선생10주기 추모식을 마쳤다. 그를 추모하는 후배 중에서 정세균 권노갑 정대철 권오을 등의 추모사가 빛을 더했다. 영원히 잊히지 않을 이철승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