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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칼럼

각자에 맞는, 各得其所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입력 2021.04.14 19:11 수정 0000.00.00 00:00

힘이 부족한 사자는 스스로 그 영역을
내주며 홀연히
떠난다
아쉽고 분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알고 마음을 비운다
그게 여생을 위한
최선책이기 때문...

ⓒ e-전라매일
요즘처럼 화사한 봄날, 어느 부부가 기도를 드린다.
“부디 옷감 100필만 내려주십시오?” 옆의 남편은 “너무 적으니 더 달라.”는 기도를 주문했다. “더 많아지면 허튼짓할 게 뻔하잖아요!” 아내의 항변이다. ‘위나라 어느 부부의 기도’로 알려진 얘기다.
이처럼 부부 사이에도 이해관계가 엇갈린다. 하물며 사제 간이나 조직의 구성원 간에 또 친구 사이 등에도 차이가 남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사람마다 만족하는 수준이나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에 생기는 불가피한 일이다. 물론 재물이나 이득은 많을수록 좋다. 그렇지만 너무 많으면 당장 보관하기도 마땅찮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남의 것을 다 차지하고 싶은 물욕과 이를 뺏기지 않으려는 방어기제가 생긴다.
게다가 재물의 과다한 소유로 생긴 사치와 향락·주색잡기나 도박 등으로 결국 인성의 파멸을 낳는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은 이런 경향에 휩쓸리게 된다. 그래서 자기 분수에 맞는 정도의 재물이 필요하다. 어쩌면 그것이 합리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끝없이 탐욕을 확대 재생산하여 자신을 노예로 만든다. 물욕 때문에 생긴 죄업은 죽어야 끝이 난다. 이처럼 재물욕을 억제하기란 난제 중의 난제다. 누구나의 로망이고 꿈이기에 죽을 때까지도 미련을 떨치지 못한다.
이는 비단 재물욕만의 문제는 아니다. 권력이나 영향력 등 비물질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욕망을 자제하기 위한 경구로 자기 처지에 맞게 얻고 행한다는 ‘각득기소(各得其所)’와 ‘각지기소(各止其所)’가 있다.
여기의 ‘득(得: 얻을 득)’은 재물이나 지위를 자기 분수에 맞게 얻음이고, ‘지(止: 그칠지)’는 처지를 알고 그에 만족하여 그침이다. 더 이상의 욕심으로 분란을 자초하지 않음이다.
사실 모든 분쟁은 그칠 줄 모르는 욕망의 무절제에서 비롯되었음을 안다면 매우 타당한 명구임에 분명하다.
춘추전국시대 위나라에 ‘첩(輒)’이라는 왕손이 있었다. 군주인 조부가 죽자 망명 중인 아비 ‘괴외(蒯聵)’의 입국을 막아 16년간이나 내란을 일으켜 국력을 낭비한다. 왕의 자리에 대한 눈앞의 욕심 때문에 부자간의 윤리를 내팽개친 것이다.
우리의 수양대군도 조카 단종을 죽인 정란 끝에 세조로 등극하였고, 형제들을 죽인 후 태종이 된 이방원, 아비 견훤을 유폐한 백제의 신검도 있었다.
남의 일이 아니다. 함께 나눌 수 없는 권력의 속성상 부자간이나 형제간에도 피를 봐야 끝이 난다. 조조의 큰아들 조비(曹丕)는 동생 조식(曹植)에게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짓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아비 사랑이 지나쳐 하마터면 정권을 빼길 뻔한 것에 분개하여 아비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불렀다. “콩깍지를 태워 콩을 볶으니/ 콩은 가마솥 안에서 우네./ 본디 한 뿌리에서 나왔건만/ 어찌 그리도 볶아대는가?” 이른바 ‘칠보시’다. 일곱 걸음 안에 지은 시라는 뜻이다. 일곱 걸음에 생사가 갈린 절체절명의 시다. 널리 회자 되는 불행의 산물이다.
이 모두 각득기소의 어려움에 대한 예 들이다. 욕망의 절제가 어렵다는 얘기다. 절제가 되지 않으면 불행한 결과가 초래됨을 알면서도 절제를 못 함은 인간만의 어리석음이다.
야생의 동물 세계는 이 원리가 잘 지켜진다. 힘이 부족한 사자는 스스로 그 영역을 내주며 홀연히 떠난다. 아쉽고 분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알고서 마음을 비운다. 그게 여생을 위한 최선책이기 때문이다. 자칫 후생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음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만은 한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허세를 부려서라도 누리려 한다. 꾸미고 과시하여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한다. 이런 일들이 마침내 전쟁을 만들고 흥망을 자초한 인류의 역사였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인간만의 숙명이다. 탐욕이 가져온 인간의 굴레다.
공자님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등용된다면의 전제하에 포부를 말해보라고 했다. 자로·염구·공서화는 정치를 희망했지만, 증석(증자의 아비)은 달랐다. “늦봄에 봄옷을 입고 갓 쓴 대여섯과 동자 예닐곱을 데리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제 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
자신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던 공자님은 “나도 그대와 같이 하겠다.”고 긍정했다. 끝없는 세속의 욕망을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길 원했음이다.
그래서 공자님은 물론 후세의 학자들도 모두 따분한 현실의 도덕적 속박을 벗어나 해방된 개성에 후한 점수를 준다. 욕심 없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과도함이 문제일 뿐 적당한 욕심은 발전의 원동력이 아닌가?
그러나 적당함은 놓치기 쉬운 유혹이다. 그칠 줄을 알면 편하고 가진 것에 만족하면 행복하다. 모든 불행은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에서 출발한다.
성경의 많은 명구에도 불구하고 “욕망은 죄를 낳고 마침내 사망을 낳는다”는 말씀은 늘 새겨야 하는 좌우명이다. 한 되의 쌀을 얻으면서도 백 되를 원하는 욕심, 그에 사로잡히면 노예가 되고 만다.
“과도한 욕망보다 큰 참사는 없고, 불만족보다 큰 죄는 없으며, 탐욕보다 큰 재앙은 없다.”는 노자나, 과도한 집착욕(貪)을 버리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진리가 되는 현장이다.
그런데도 욕망은 자꾸 우릴 끌고서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방치하고 만다. 그게 불행이다. 욕망의 올가미에 끌려다니다가 모처럼의 봄날은 다 지나간다.
벚꽃이 만발하여 온 세상이 환한 꽃세상, 모든 걸 내려놓고 꽃만큼이나 화사한 여유를 맞이하자. 탐욕은 허방이요, 봄날은 꿈꾸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벚꽃과 함께 부질없는 욕망도 곧 지나가고 말리니. 요즘처럼 화사한 봄날, 훈훈한 꽃바람 가득 안고 봄노래 부르는 것이 행복이다.




양태규
옛글 21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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