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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어깨 수술을 했다. 그리고 작년 겨울에 또 눈 수술을 하였다.
싸늘한 수술대 위에 누워 ‘나는 왜 이렇게 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일까?’ ‘조금 더 살아서 무엇을 어찌 하려고 이리 고통스런 수술의 공포를 감내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자문해 본 일이 있었다.
삶과 죽음, 이 중간 사이에서 언제가 닥쳐올 죽음을 생각해 보면서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고 자탄한 버나드쇼의 묘비명처럼, ‘내 인생도 어느 날 그렇게 끝나고 마는 게 아닐까?’하고
모든 게 생겨남과 사라짐의 순환 고리를 돌고/ 그것들이 우리 각각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때로는 생성이 되고 때로는 소멸이 되는 것이리
사라진 것은 새로 생겨나는 것의 씨앗이고/ 생겨나는 것은 앞서 사라진 것의 열매이니/ 푸르던 잎 저리 붉게 시들어 지는 것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생성이고 소멸이고 또 생성이리
- <작자 미상>
삶과 죽음을 단절로 보지 않고 있다.
하나의 연속성으로 이어져 있다고 보고 있다. 이는 불교의 윤회나 기독교의 부활과도 맥을 같이 하는 연기론적 세계관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승에서 착하게 살아야 죽어서 천당의 문에 들어 갈 수 있고, 극락에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 내가 점심을 대접하면 이것이 내게 아름다운 소문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이 그것이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다른 에너지로 변화하여 돌아온다고 보고 있다.
때문에, 죽음은 궁극적으로 소멸이 아니라 업(業)에 따라 윤회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해도 「님의 침묵」에서 ‘이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라고 했듯이 영적으로 깨친 자들에게 있어서의 ‘죽음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며, 절망이 아니고 새로운 희망이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을 가지고 온다. 춘하추동의 순환도 이러한 자연의 이법에 따라 봄에 뿌린 씨앗이 가을에 열매가 되고, 그 열매가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다른 생(生)이 다시 시작된다.
이러한 연기와 윤회로 우주만상이 생멸을 거듭하며.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이 하나로 이어져 순환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태어나서 죽어가는 허무적 생사관(生死觀)을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생성적 사생관(死生觀)으로 죽음의 본질을 새롭게 정립한 이가 있다.
겨울을 일 년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고, 일 년의 마지막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겨울을 일 년의 시작으로 보는 농부는 겨우 내 객토도 하고 농사준비 기간으로 보내지만, 게으른 농부는 겨울 내내 움추리거나 사랑방에서 노름이나 합니다. 그러나 일 년 후 추수에서 두 농부의 차이는 엄청날 것입니다.
- 김덕권, 「죽음보따리」에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새로운 생명이 소생하듯, 잘 죽어야 다시 잘 태어날 수 있다하니, 죽음은 새로운 탄생의 밑거름이 된다.
태어나 사라지는 ‘생사(生死)’의 세계가 아니라,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사생(死生)의 자연관’으로 내세에 대한 기쁨과 소망으로 남은 생을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 앞에서 보다 자유로운 노년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달라이라마의 주치의인 티벳의 배리커진 스님도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업에 따라 다시 돌아오기에 현세에 수행을 멈추지 말고 선행을 베풀어야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진정 두려워야 할 것은 ‘내일의 죽음’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야고보서 4장) 그러기에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죽어간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져 가는 이 생(生)과 사(死), 사(死)와 생(生)의 윤회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죽어도 죽지 않은 삶이 될 것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볼 일이다.
김동수 시인
본지 독자권익위원회 회장
사)전라정신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