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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전라매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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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크리스털 꽃병이 하나 있다. 결혼 선물로 받은, 30년이 넘은 꽃병이다. 현란한 커팅, 밝고 투명한 빛깔, 기분 좋은 무게, 잘록한 허리가 있어 손아귀에 쏘옥 들어오는 적당한 크기의 꽃병은 크리스털이 가진 매력을 모두 지니고 있다.
결혼 초엔 꽃병에 꽃이 없다는 걸 상상 할 수 없는 일상이 이어졌다. 그러나 삶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는 것이었을까. 언제부턴가 꽃병에 꽃을 꽂는 일이 사치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생활에 쫓겨 집을 비우며 세상의 바다로 나가게 됐을 때, 손님을 맞으며 꽃을 장식했던 꽃병이 비어 있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이른 봄 노란 프리지어를 크리스털 꽃병에 가득 꽂아 놓고 그 찬란함을 보고 있노라면 봄의 의식 인 듯 마음 까지 화사했었다. 일 년 내내 꽃병이 비어 있었어도 이 프리지어 의식을 치르고 나면 우울함이 사라졌다. 어느 날인가 꽃병을 꼼꼼히 씻어 그릇장 속에 깊숙이 넣어 버렸다. 꽃을 꽂는 날이 거의 없었다. 참으로 푸석하고 삭막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몇 년째 꽃병은 그릇장에 그대로 있었다. 식구들이 각자의 일에 쫓겨 외지로 나가게 되고 나 홀로 남게 되자 꽃은 고사하고 끼니 챙기기도 귀찮아졌다. 집안이 북적일 땐 혼자 있지 못함에 발작할 것 같더니 적당한 소음이 간절해졌다. 코로나 블루, 코로나 레드, 코로나 블랙. 각자의 색깔로 코로나를 견디고 있는 봄이 벌써 두 번째다. 작년엔 블루 같더니 올해는 레드쯤 되는지 때때로 이 상황이 분노로 표현된다. 어느 날 병원에 다녀오다가 길 건너에 있는 로컬 푸드에 들렀다. 봄이 거기에 다 모여있었다. 쑥, 냉이, 두릅, 곰취, 쑥떡 나는 봄을 움켜쥐듯 이것 들을 바구니에 정신없이 담았다. 봄을 한 바구니 들고 돌아서는데 노란 프리지어가 가득 담긴 양동이가 눈에 띄었다. 갑자기 그릇장 깊숙이 넣어둔 크리스털 꽃병이 생각났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프리지어 의식도 그리웠다. ‘그래, 꽃병도 숨을 쉬어야지.’ 프리지어 꽃다발을 급히 집어 들었다.
크리스털 꽃병은 노란 프리지어를 가득 담고 언제 갇혀 있었냐는 듯 다시 찬란했다. 꽃병의 잘록한 허리가 너무도 유연해서 잠시 가여워했던 게 민망하기까지 했다. 꽃병에 꽃이 꽂혀 있었을 땐 즐거움과 기쁨이 꽃병에 다 담겨있는 듯 충만했었다. 꽃병이 비어 있거나 시든 꽃이 꽂혀 있을 땐 쓸쓸하고 우울해서 항상 불행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꽃이 있어 반드시 행복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고 꽃병을 그릇장에 넣어 놨다고 불행한 것도 아닌 걸 보면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다. 꼭 꽃병의 꽃이 아니라도 우리가 꽃으로 피어난다면 아니, 내가 꽃이 되어 산다면 훨씬 희망적일 것 같다. 시든 꽃 바라볼 일도 없고 빈 꽃병에 가슴 아플 일도 없을 테니 삶이 한결 단순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단순해진다는 건 다 내려놓는 것, 혹은 야단스럽지 않다는 것, 때때로 허영에 빠지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꽃병의 꽃에 그토록 집착했던 건, 어쩌면 꽃이 있는 삶에 대한 허영이 아니었나 싶다. 결핍이 많은 생활을 꽃이 보상 해 줄 거라는 가엾은 생각 같은 것 말이다. 꽃병의 꽃은 평화와 위안을 주고, 맡아지는 향기는 사랑에 빠진 듯 환희롭다. 아! 꽃을 보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최화경
전주문협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