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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전라매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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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장자 사이에는 서양과 동양, 그리고 2000년이 넘는 시·공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들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교훈 중의 하나는 우리의 생(生)이 세상의 평판을 좇아가는 삶이 아니라 ‘너는 네 삶을 살아가라’는 깨우침이다. 세상 누구도 나의 삶을 대신 살아 줄 수 없으니,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하여 네 스타일로 네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남에게 흔들리지 않는 삶. ‘내가 나답게 살아가는 삶’이다. 삶의 답을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삶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정 부분 내 삶의 어느 한 부분을 포기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누구를 탓하지 않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무엇인 지를 찾아 묵묵히 자기의 삶을 개선해가는 긍정적 수용의 삶이다. 누구에 대한 원망도 그렇다고 독불장군식 자기고집의 독선과 오만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현실에 충실하는 외롭고 고단한 자기 극복의 길이다.
모든 문제의 답은 남에게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다. 내 운명을 내가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해 가는 데 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아 예기치 않는 장벽이 늘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대응 방식에는 두 방식의 삶의 길이 있다. 현실을 불평하고 회피하는 부정적 인식의 삶과, 고난의 현실을 받아들여 운명을 재창조해가는 자기 승화(昇華)의 길이 있다.
해발 3.000m가 넘는 높은 산에는 수목 한계선인 지대가 있다. 이곳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곧게 자라지 못한다. 무릎 꿇고 고개를 움츠리고 있어야 눈보라 속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다. 이 나무들로 명품 바이올린을 만든다고 한다. 두들겨 맞은 쇠붙이가 불 속에서 강해지듯 우리의 몸과 정신도 시련과 고난 속에서 더욱 단단해지고 깊어진다.
그래서 인간을 ‘호모파티엔스(homo patiens)’, 곧 ‘인간은 고통의 동물’이라 부르기도 하고, ‘인생은 고해(苦海)’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의 참뜻은 시련과 고통이 나의 적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고 축복을 주기 위한 통로라 여겨 그 ’고통‘을 하나하나 극복해 가라는 말이다. 그런 자만이 ‘고난 속에서 영광을 얻을 수 있고’(고린도후서 4:17), ‘번뇌 속에서도 보리(진리)를 얻을 수’(법화경) 있다는 것이다.
화가의 마음으로 산을 보면 좋고 나쁜 돌이 따로 없고(畵意看山無惡石), 도(道)를 닦는 도인의 마음으로 물을 건너가다 보면 마치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된다(禪意渡江眞生魚)는 옛 선시(禪詩)처럼, 아무리 견디기 힘든 고통이 왔다 해도 그것이 세상의 끝이 아니니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충격이 진정되어 거기에서 새로운 길이 보이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주변 환경에 흔들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그때그때 그 곳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라는 것이다.
지난 4월 미국에서 오스카상을 받은 윤여정도 그의 수상 소감에서 “내 마음대로 하는 환경에서 일하면 괴물이 될 수 있다” “두 아들이 나를 일하러 가게 만들어서” 이런 결과를 얻었다고 했다. 최고를 지향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길에서 최선을 다해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실례를 보여준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하늘을 나는 붕새에게는 붕새의 삶이 있고, 나뭇가지 사이를 나는 산새에게는 산새의 삶이 있다(장자). 세상의 모든 가치는 시간과 장소, 입장과 처지에 따라 원근법적인 평가가 있을 뿐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 톤 텔레헨이 쓴 『고슴도치의 소원』에서 거북이가 달팽이에게 “너는 왜 그리 느리게 가냐고 묻자” “나는 내 속도로 갈 거야” “쉬었다 가는 것도 내 속도의 일부야”하는 달팽이의 유유자적한 삶도 있다.
‘어느 것도 최선의 길일 수 없고’ ‘모두가 가야할 단 하나의 길이란 존재하지 않으니(니체) 너는 너의 길, 곧 네 삶을 살아가라 한다. 그 길만이 결핍을 발전적으로 승화시켜 자기의 존엄과 자기의 가치를 스스로 길러가는 자기애(自己愛)의 길이 아닌가 한다.
/김동수 시인
본지 독자권익위원회 회장
사)전라정신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