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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전라매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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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음식은 왜 그리 맛있어, 아무 식당에 가도 실패하는 일이 없으니...
그리고 참 잘 놀아. 잘 노는 게 전라도 사람들이여, 인심까지도 넉넉하고... 후후후 “토종 전라도 어매인 우리 어머니, 그의 머리 속엔 먹는 일밖에 없는 듯 보인다. ‘무얼 맛있게 해 먹이지, 여름 더워지기 전에 붕어라도 푹 고아 멕이는 게 좋을까? 머위대에 들깻가루 풀어 푸짐하게 볶아줄까? 먹는 것 말고는 생각할 게 있어야지’ 대한민국 여자들 중 이렇게 음식걱정이 유난스럽게 많은 것도 전라도 여자들, 우리 엄마들이다. 너른 김제 들판에는 모내기가 시작되고, 지천으로 넒은 들판이나 산에는 갖가지 나물과 고사리, 취나물, 느타리 버섯, 엄나무 순 등 먹거리들이 풍년인 곳이 전라도 땅이요 그 땅을 지고 이고 살아가는 넉넉한 인심이 사는 곳이다. 분명 정치권력이라는 면에서 불행해 보이는 것, 서기 663년, 지금 동진강 하류(백촌강) 전투에서 망한 백제를 다시 일으키고자 벌인 왜와 백제 연합군 2만 명이 한꺼번에 패하고, 또 다시 900년 견훤장군이 전주인 완산주를 수도로 삼아 다시 후백제를 건국하고자 했지만 40년 만에 고스란히 정권을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 내주는 실패 이후 이 전라도 땅은 중앙 정부 권력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소외되어 있었으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넒은 평야를 가꾸고 조용히 자손들을 가르치고 유유자적 음풍농월 세월을 노래하는 것 뿐... 정확히 얘기하면 중앙권력세력에서 밀려난 지역이기 때문에 중앙에서 벌어지는 소론이니 노론이니 하는 사색당파나 정치 놀음이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그저 담담히 구경꾼으로 지켜 볼 뿐... 서울을 중심으로 다른 지역 사람들이 자기들끼리의 정치 놀음과 권력싸움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전라도 사람들은 정치 권력 대신 삶을 풍요롭게 하는 문화분야를 선택했다. 여자들이나 쓰는 언문을 가지고 우리의 영원한 고전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등의 고전문학을 완성해 내고 나무목판에 우리의 고소설과 역사서, 동의보감 같은 의학서적 등은 목판인쇄하여 서로 돌려 보며 즐기고, 그렇게 놀고 즐기며 만들어낸 이야기가 한국의 대표적 고전문학으로 완성되어갔다. 이 고전문학을 더 쉽게 재미있게 놀기 위해 이 스토리에 가락과 장단을 집어넣어 새로운 놀이 음악을 만들어 낸게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인류문화 유산인 판소리 12마당으로 창작되었고, 창작한 주인공이 바로 이 전라도 사람들이다. 19세기에 고창 지역에서 활동했던 중인 출신의 신재효(申在孝, 1812-1884)에 의해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별가〉, 〈적벽가〉, 〈변강쇠타령〉의 여섯 마당으로 정리되었다. 판소리에 대한 그의 업적이 거론되지만 기회가 되면 그의 결정적인 모자람을 말할 수 있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은 이 근대 유산인 판소리를 구전심수(口傳心受), 뜻 그대로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는다’이라는 말로 이 놀라운 작품을 쓰고 창작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잊혀지고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고, 누구도 위대한 걸작을 지은 사람이나 곡을 만든 작곡가를 찾으려는 노력 역시 하지 않았다. 그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구전심수라고 하면서, 임자없는 우리의 고전 걸작 판소리 문학과 음악이 되어있다. 그 내면에는 조선의 공식문자인 한자를 중시하는 양반 권력집단의 공식문자인 한자로 쓰여지지 않은 그저 상것들의 기록, 날것의 문화여서 하찮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설사 이 작품을 지은 창작자가 양반이라면 더욱이 양반 체면 때문에 이름을 밝히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작가가 허균이라는 점, 전라도 부안군 변산면에서 쓴 사실은 그가 죽은 이후에야 밝혀졌는데 바로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의 택당집(澤堂集)에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가가 만약 상민이나 천민이었다면 그 성이나 이름조차 없는 천한 신분이어서 더 쉽게 이름조차 지워져 버렸으니 우리 기록 유산의 결정적 가장 큰 오점이다.
조선왕조 500년의 가장 부끄러운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한글 고전 작품인 판소리 문학과 음악이 그저 상것들의 언어, 언문으로 쓰여진 유치한 놀음으로 치부되어 도리어 부끄럽게 취급됐다. 사실 우리의 한글이 조선의 공식문자로 인정받은 것이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때야 이뤄졌고, 나라가 망한 1911년에야 조선어학회가 생겨 처음으로 우리 한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부끄러운 역사를 분명히 인식하고 반성해야한다.<다음주에 계속>
/최공섭
프리랜서 피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