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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전라매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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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츠하이머에 걸린 30대 미혼 여자 이야기를 다룬 TV 드라마가 막을 내렸다. 노인의 병 인 줄만 알았던 치매가 젊은 사람에게도 올 수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치매증상은 다 아는 얘기인데도 병의 진행 상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해 보여 주어서인지 드라마지만 두렵고 안타까웠다. 드라마에 몰입됐을 땐, 주인공 여자의 치매까지 사랑하는 남자 주인공의 달콤함에 빠져 그 끔찍한 치매 이야기를 보면서도 도무지 심각해지지가 않았다.
약간의 건망증만 있어도 자랑스럽게 ‘나 치맨가 봐.’ 하면서 깔깔대기도 했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면 지워진다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당장 생각이 안 나는 게 아니라 지우개로 지우듯 어느 부분, 어떤 사람에 대한 기억이 몽땅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너무 막막하지 않은가. 더구나 잊힌 자체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허망한가. 나에게 그런 형벌 같은 병이 오지 않은 것에 감사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는 건망증에 진저리를 칠 때가 있다.
난 요즘 포스트잇이 없으면 거의 일 처리를 못 한다. 적어서 붙여 두지 않으면 까마득히 생각이 나지 않아 모든 일을 매끄럽게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정, 주문, 읽어야 할 책, 계좌번호, 전화번호 기억해야 할 게 많기도 하다. 하다못해 장보기 목록도 포스트잇에 적어 지갑에 붙여둬야 할 지경이다. 덕지덕지 포스트잇이 붙은 내 탁상 달력은 마치 색색의 리본을 달고 서 있는 서낭당 나무 같다.
달력에 표시하지 않고 기억하던 양호한 시절이 언제였던가. 너무 아득해서 내가 백 살은 먹어 보인다. 지금은 형광색의 포스트잇이 자극돼 잊지 않는 데 도움을 준다. 일들이 처리됐을 때 포스트잇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탁상 달력은 마침내 나목처럼 정갈해진다. 시간이 지나면, 내 건망증의 부피만큼 또다시 붙여진 포스트잇이 작은 깃발처럼 펄럭일 것이다. 포스트잇은 쿨하다. 끈적이며 달라붙지 않아 던적스럽지 않은 연인 같다.
떼어낸 흔적없이 깔끔한 포스트잇은 상처 없는 연애 같아 신경 쓰이지 않는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나쁜 일과 언짢은 얘기는 포스트잇에 빼곡히 써서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붙여 놨다가 마음에 평화가 오거든 떼어 버리면 어떨까 싶다. 그때, 미움도 원망도 흔적 없이 떨어져 같이 사라져 버릴 것 같지 않은가.
난 알츠하이머 환자처럼 달력과 냉장고, 책갈피, 심지어 김치통에, 김치 담가준 사람 이름을 적은 포스트잇을 우표처럼 붙여 놓고 잊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모든 일이 처리되고 배반하듯 내쳐진 포스트잇은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진다. 그러나 절대로 상처 따윈 받지 않을 듯 오늘도 포스트잇은 그 자극적인 형광색을 채찍처럼 휘두르며 내게 모든 걸 기억하게 하고 행동하게 한다.
오오, 나의 똑똑하고 유능한 비서여!
/최화경
전주문협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