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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시인의눈] 표표해지는 마음

전라매일 기자 입력 2022.09.18 17:42 수정 0000.00.00 00:00

ⓒ e-전라매일
늦은 저녁 천변을 걸었다. 천변을 걷는 동안 날마다 낯선 풍경 탓에 아주 잠시 멍해지기도 하고 건강해지는 나를 억지로 인식해 보기도 한다. 저 멀리 메밀밭인 듯 무리지어 핀 안개꽃인 듯 어제는 보지 못했던,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나며 흔들리는 풍경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가까이 보니까 핑크 플리베인이었다. 국화과 두해살이 들꽃이다. 우리가 계란 꽃 또는 개망초라고 부르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흔하게 보는 귀화식물이다.
1899년 우리나라에 철도가 부설될 때 철도 침목이 대부분 북미에서 수입되었다. 이 침목 사이에 핑크 플리베인 씨앗이 들어온 모양이다. 일본이 철도를 부설할 때 부지를 헐값에 강탈하다시피 하고 산과 조상 묘를 함부로 파헤치니 일본과 철도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극에 달했다. 철도를 따라 하얀 꽃이 피어나자 어떤 이는 일본이 조선을 망하게 하려고 씨를 뿌렸다고 했다. 그래서 망국초라고 불렀고 또 ‘망할 놈의 풀’ 망초라고 불렀다. 가끔은 이름이 삶을 대변하기도 한다. ‘개’란 접두사를 붙어 망초보다 못한 꽃이란 뜻으로 개망초라고 불리며 우리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꽃이다. 아름다운 모습과는 달리 민망한 이름과 누명을 쓰고 있는 꽃 개망초, 핑크 플리베인이다. 한여름의 태양을 피하지 않고 여름이 다 가도록 우리 곁에서 하얗게 지키고 있다. 핑크 플리베인으로 피었던 그곳과는 다른 꽃이 피기 시작했다. 개망초라 불리면서 더 크고 예쁜 꽃으로 피어났다. 자신의 이름을 마뜩잖아 하지 않고 표표해지는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살아온 시골집이 기억난다. 마당에는 살구나무가 있었다. 창문을 열면 초록 이파리 분홍 살구꽃 볼그레한 주황빛 열매도 만질 수 있었다. 살구! 어쩌면 이렇게 딱 맞는 이름이 주어졌을까. 살구! 불러주면 그 위에 이야기를 덧입혀 준다. 이웃집 살구하고 비교해 보면 정말 커서 모두가 좋아했다. 떡 살구라 불리는 우리 집 살구를 선생님께 드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선생님은 ‘아, 맛있겠다!’ 하시며 단맛과 신맛의 표정을 지으셨고, 그걸 보는 나는 정말 좋았다. 살구가 다 없어질 때까지 수시로 책상 위에 놓고 오기도 했다. 혼자서 선생님 표정을 훔쳐보며. 살구 역시 떡 살구란 이름을 마뜩잖아할지도 모르지만. 능소화는 바람에 흔들리고 쓸쓸함이 덩달아 흔들린다. 살금살금 조용히 앉는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진채란 시인
전북시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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