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숙 전라매일 편집위원
지금은 겨울이다. 아직 함박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여일에 전 첫눈은 살포시 휘날리었고, 골짜기를 스치는 바람에는 이미 깊어가는 겨울의 냄새가 묻어 있다. 금세라도 하얀 눈발이 흩날릴 것 같은 날씨다. 이런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어린 시절의 겨울로 돌아간다. 몸은 현재에 있지만, 마음은 오래전 그 시절에 머문다.
할아버지 방의 화로 앞에 둘러앉아 조그마한 고구마와 군밤을 구워 먹던 시간. 불 위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익어가던 군밤과 껍질이 갈라지며 김을 내뿜던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다.
할아버지는 화롯불을 들여다보며 옛이야기를 들려주셨고, 나는 숨소리마저 죽인 채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 밤의 온도는 늘 일정했다. 밖은 분명 겨울이었지만, 그 방 안에서는 추위를 느낄 틈이 없었다.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고구마 타는 냄새를 맡고 있으면, 큰 가마솥에서는 누렁이가 먹을 여물이 모락모락 김을 내며 끓고 있었다. 여물 끓는 소리와 장작 타는 냄새, 어른들의 낮은 말소리가 섞여 겨울밤의 풍경을 만들었다. 왜 그렇게 따뜻했을까. 왜 겨울은 늘 포근하게 기억될까. 아마도 그 시절의 나는 추위보다 사랑을 먼저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밤이 되면 마당 위로 별빛이 쏟아졌다. 눈이 내린 새벽이면 토끼와 고라니, 사슴, 이름 모를 야생의 동물들이 남기고 간 발자국이 흰 눈 위에 그림처럼 펼쳐졌다.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어디를 다녀갔는지 눈 위의 흔적들이 말해주곤 했다. 참새도 다녀갔고, 토끼와 꿩도 바삐 지나갔다. 어느 날은 추위에 떨던 고라니가 대문을 슬며시 밀고 들어와 나뭇간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할아버지는 고라니가 놀라지 않도록 조용조용 걸음을 옮기셨다.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으시고, 괜히 기척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눈치를 보던 고라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사라졌고, 할아버지는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인자하게 중얼거리셨다. “저 추운 겨울에, 먹을 게 있어야지…”
그래서 우리 집의 대문은 겨울내내 닫히지 않았다. 춥고 갈 곳 없는 짐승들, 배고픈 생명들이 잠시라도 쉬어가라고. 나뭇간에는 지푸라기를 넉넉히 깔아두고, 누구라도 머물다 갈 수 있게 자리를 비워두셨다. 그 배려는 말로 가르치지 않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 오래도록 남았기에 지금도 기억하는 것이다.
이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지만, 겨울이 오면 나는 여전히 그 마음을 꺼내 든다. 그 따뜻함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의 겨울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만들었다. 눈이 오지 않는 한겨울에도 마음 한켠이 포근한 이유는, 오래전 그 겨울에 내가 할아버지와 우리 가족들에게 충분히 사랑받았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새 겨울은 현재가 되었다.
어린 시절의 겨울이 기억 속에 남아 나를 데리고 왔다면, 지금의 겨울은 나를 다시 밖으로 불러낸다. 집에서 멀지 않은 산 아래, 작은 농막이 있는 곳-덕진구 만성동 산비탈. 그곳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를 부르지만, 특히 겨울이 되면 마음이 먼저 가 있는 장소가 된다.
지금은 꽃이 피지 않는 계절이다. 나무들은 잎을 모두 내려놓았고, 땅은 단단히 굳어 있다.
하지만 겨울의 농막은 비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숨결로 가득하다. 산에서는 야생의 친구들이 기척을 남기고, 농막에서는 내가 돌보는 아이들이 날마다 나를 기다린다. 계절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기다리는 존재들이다.
농막에 다다르면 가장 먼저 들려오는 것은 소리다.
산냥이의 낮고 부드러운 울음, 검둥이와 흰둥이가 반가움에 꼬리를 흔들며 내는 발소리, 기러기와 닭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건네는 인사. 아이들은 서로 다른 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하루를 채운다. 그 소리들은 겹치지 않고 어울린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 모든 소리는 하나의 환영이 된다.
겨울이라 꽃도 없고 과일도 없지만, 이곳에는 기다림이 있다. 내가 오기를 알고, 내가 나타나면 반가워하며,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는 듯한 눈빛을 건네는 존재들. 그 눈빛 앞에서는 마음이 저절로 낮아진다. 나 또한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고 있고, 누군가에게 기다려지는 존재라는 사실이 조용히 다가온다.
난로에 불을 지피면 장작 타는 냄새가 농막 안에 퍼진다. 고구마를 올려놓고, 군밤을 몇 알 얹어두면 불꽃 위로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책을 펼쳐도,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은 조급해지지 않는다. 눈이 보슬보슬 내리는 날에는 창밖을 오래 바라보며 생각한다. ‘아, 이게 바로 행복이구나.’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순간이다.
가끔은 밤이 깊어지면 고라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엔 조금 무섭게 느껴지지만, 이내 그 소리마저 익숙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 소리, 떨어지는 도토리 껍질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산의 숨결까지도...
겨울 산은 고요하지만, 결코 적막하지 않다. 그 모든 소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문득 나는 깨닫는다. 어린 시절, 겨울내내 열려 있던 대문과 지푸라기를 깔아두던 나뭇간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잠시라도 머물 자리를 내어주던 그 마음이 지금의 농막에 고스란히 이어져 있다는 것을. 기다려주는 생명들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다시 이곳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농막으로 향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가 있다. 겨울이라는 계절이 나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를 조용히 되묻는 것처럼 느껴진다.
녹지 않은 겨울의 시간 속에서, 나는 깨우쳐 간다.
지금의 이 삶이 얼마나 고마운지.
날마다 기다려주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래서 오늘도 나는 이 겨울을 견딘다.
그리고 또 한 번, 마음이 머무는 곳으로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