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규 본지 논설위원
또 한 해가 저문다. 달력은 마지막 장을 펼친 채 조용히 작별을 고한다. 연말의 분주함 속에서 우리는 시간의 결을 손끝으로 더듬는다. 그 사이로 웃음과 눈물, 말없이 흘려보낸 순간들이 안개처럼 스며든다. 붙잡으려 할수록 손에서 빠져나간 기억들이다.
매년 이맘때면 마음 깊은 곳에 묵혀 두었던 질문이 다시 고개를 든다.
“아니, 벌써? 아, 세월의 덧없음이여!…”
화려했던 날들은 사라지고, 다짐은 흩어진다. 이루지 못한 일과 선택하지 못한 것만이 마음에 남는다. 우리는 그 흔적 위에서 다시 선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언제 꺼질지 모를 위태로움 속에서 희미한 빛을 이어간다. 수없이 위기를 지나며 조심스러워지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마음에 새긴다. 후회는 누구에게나 흔적으로 남는다. 아물지 않은 상처이면서도 다음 걸음을 한층 더 신중하게 만드는 삶의 표식이 된다.
세월은 왜 이렇게 무심히 흐르는가. 인생은 시간의 연속이다. 초침이 만들어내는 분과 시간, 그 조각들이 모여 하루가 되고 일 년이 되며 마침내 한 사람의 생애가 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잊은 채 살아간다. 시간은 조용히 흐르지만, 분명한 언어로 속삭인다. 지금의 선택이 곧 삶임을 상기시킨다.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언가와 부딪히는 일이다. 살면서 아프고 늙으며, 결국 죽음을 맞는다. 진학, 취업, 결혼 같은 현실 문제부터 “나는 왜 사는가”라는 근원적 질문까지 우리는 늘 답을 찾는다. 그러다 문득 삶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리 애써도 허무가 발목을 붙잡는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랑마저 희미해질 때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정말 사랑이 모든 답일까. 새들은 둥지를 틀 자리를 아는데 인간은 왜 삶의 목적 앞에서 이토록 방황하는가.
기독교는 인생을 안개에, 불교는 한 조각 구름에 비유한다. 테레사 수녀는 삶을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라 했다. 결국 삶은 잠시 머무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토록 집착하며 살아가는가. 이미 태어났고,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인생을 낙원을 준비하는 시험이라 하고 누군가는 고행이라 말한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은 늘 먼 곳에 머물러 있어, 오늘의 삶은 초라하고 의미가 쉽게 흐려진다.
오늘날 신앙은 무뎌졌다. 낙원에 대한 갈망보다 지금의 안락함에 익숙하다. “나 예수 믿어요”라는 고백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믿음은 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실천 없는 신앙은 껍데기에 불과하며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자기 위안에 머물 뿐이다.
죽음은 인류가 가장 오래 마주해온 질문이다. 종교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죽음이 있기에 삶은 빛나고 끝이 있기에 하루는 소중해진다고 말한다. 진정한 종교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임으로써 오늘을 더 진지하게 살게 한다.
인생은 거창하지 않다. 인생은 초침의 움직임이다. 작은 똑딱거림이 모여 하루를 만들고, 그 하루들이 쌓여 삶이 된다. 그러나 초침은 언젠가 멈춘다. 그 멈춤의 순간을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모두 그 시간을 행해 걸어가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초침이 여전히 돌고 있음을 의미한다.
빛이 어둠을 통해 드러나듯, 삶도 죽음을 통해 선명해진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로 바뀌어야 한다.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넘어지고, 후회하며 다시 일어난다. 아주 느리게나마 배우며 깨닫는다.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나를 만든다는 사실을.
오늘도 초침은 돌고 있다. 멈추지 않는 리듬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삶의 숨결을 이어간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내일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완전하지 않더라도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 한 걸음이 모여 희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