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열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탄핵 정국이 계속되면서 정치지도자들의 면모가 자꾸 바뀌어 왔다.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희망의 폭이 넓어진다고 생각되어 바람직스럽다. 아니 바람직스럽다고 생각해야 옳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게끔 하는 꼬락서니가 점점 뒤틀려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과거 정치지도자들의 행태도 깊이 파고들면 별것 없었지 않았냐고 항의할 사람도 많겠지만 그들의 연륜은 무시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 권세를 쥔 막강한 힘이 아니라 비록 야당을 벗어나지 못했을 때도 민주화를 위한 바른길, 옳은 길을 제시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자유당에 의한 이승만 영구집권 시도가 4.19혁명으로 끝나면서 새로운 민주정권이 들어섰으나 5.16쿠데타가 길을 가로막았다. 박정희는 정치질서가 회복되는 대로 군에 복귀하고 민정으로 이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헛말이 되었고 군시독재 18년5개월을 누렸다.
그 중간에 10월유신을 선포하여 유신공화국을 만들어놨다. 이 시기는 수많은 야당 지도자를 등장시켰고 정보 정치의 태풍으로 엄청난 인권 탄압이 최고조에 올랐다. 민정 초기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 유진오 전 고대총장 등이 유명세로 야당 지도자가 되었지만 군사독재 여당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신민당을 중심으로 한 유진산총재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능굴능신의 정치력을 발휘했으나 10월유신을 자행한 박정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에 독립운동가 출신인 양일동총재가 유신반대 기치를 내걸고 민주통일당을 창당하면서 정계는 아연 긴장하게 된다. 통일당은 처음에 야당의원 39명이 가담했으나 중안정보부의 강력한 제동에 대부분 꼬리를 감추고 독립운동으로 단련된 김홍일장군, 장준하선생, 정화암선생, 윤제술선생, 유청선생, 이봉학선생 등이 참여하며 박병배 김녹영 김경인의원 등 세 의원이 창당의 깃발이 되었다.
양일동은 특유의 배짱과 추진력으로 기세를 올렸지만 1구2인제로 바뀐 선거법과 정권의 강력한 탄압으로 당대의 명사들이 모두 낙선하고 세 사람의 당선자를 내는데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세력과 힘을 합쳐 유신반대 운동의 선봉이 되었으며 긴급조치1호로 장준하와 통일당 집행부가 모두 구속되는 등 9호까지 이어지는 긴급조치 수난자가 무려 300명에 이르는 혹독한 억압의 제1호 대상이 되었다. 10.26사태로 정국은 반전되는 듯싶었으나 전두환 신군부는 3김의 분열을 틈타 5.18로 165명의 희생자를 내며 수천 명의 부상자가 지금까지 신음하고 있는 형세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3인이 국민의 주목을 받는 야당의 첨병이 되었다. 원래 김종필은 정보부와 유신으로 얼룩진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지만 새로운 군사 독재자가 등장하며 그를 역설적으로 민주인사인 양 탈바꿈시켰다.
원래 이철승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김종필이 차지한 것은 모략과 황금이 지배하는 정치 논리를 거부한 장준하 이철승 같은 인사들이 겪어야 하는 필연적 귀결일까? 아무튼 3김은 철권 독재 앞에서도 힘을 모으지 않고 제각각 지역 팬덤에 기대어 오직 자기 살길만 찾는 듯했다. 그러나 전두환 말기에 과감하게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만들어 시민세력과 정치세력을 합일화 시키며 민주화부터 쟁취하는 것이 정치 순서임을 일깨운다. 수십년 동안 치고 받으며 하나가 되지 못했던 양김의 결단이 민추협으로 열매를 맺으며 국민의 최대 관심사였던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시키는데 온 힘을 쏟게 된다. 6월항쟁이다. 전두환은 노태우를 후보로 세워 선거인단 선거로 끝내려고 했으나 열화같은 국민의 궐기에 백기를 든다. 민주화 앞에 일단 물러선 YS DJ는 한발 물러서 백발 앞으로 나가는 전략에 동의한 셈이다. 김종필도 따를 수밖에.
그 뒤 대통령 직선제를 수락한 전두환은 교묘하게 3김을 분열시키며 노태우의 신승(辛勝)을 얻어낸다. 그러나 그 때 쟁취한 ‘87체제는 민주화의 상징으로 40년 가까이 유지되고 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꿈에 그리던 대통력직을 차례로 거머쥐며 정치의 승자로 우뚝 섰다. 후배들도 덩달아 배지를 다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며 꿈을 키울 수 있었지만 정치의 본질은 제대로 익히지 못한 듯싶어 안타깝다. 지금 세계는 전쟁으로 얼룩졌지만 과학계의 놀라운 발달로 AI세상이 되고 있다. 그런데 정치만은 옛날 정치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한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간에 바라보는 건 지역 위주의 팬덤뿐이다. 게다가 당내에서도 서로 찢고 가른다. 진보는 자주와 동맹파가 갈려 있고 보수는 찬탄과 반탄이 으르렁댄다. 당권을 잡은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반대파를 수용할 줄 알아야 제대로 된 정치에 입문하는 것이다. 돈 먹고 공천장사를 했으면 과감하게 잘라야 한다. 정치를 좀 제대로 배워서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