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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칼럼

물머리에 서다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입력 2026.04.13 13:57 수정 2026.04.13 01:57

유인봉 시인 / 수필가

춘분을 앞두고 봄비가 추적추적 내립니다. 나들목을 빠져나오자 비가 눈이 되어 날립니다. 싸락눈처럼 날리더니 장수 읍내로 들어서는 싸리재쯤 이르자 눈송이로 변합니다. 산허리부터 근사한 설경이 펼쳐집니다. 차 머리는 읍내를 휘돌아 수분재를 향합니다. 금강과 섬진강의 물길이 나누어 시작되는 수분재, 비 온 뒤 내린 눈이 채 녹지 못하고 수분마을로 들어가는 포장길이 질척거립니다. 사과나무 과수원, 막 움 틔우려는 마른 가지 위로 하얀 눈이 소복소복 두께를 더합니다.

뜬봉샘 주차장 오르는 길이 미끄럽습니다. 방문자센터에 차를 남겨 두고 신발 끈을 단단히 동여맵니다. 주차장 입구에서 간단한 안내를 받고 산길을 오릅니다. 입구를 지나 계곡으로 나 있는 탐방로로 접어들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눈꽃 천지가 펼쳐집니다. 가시덤불마다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얼굴만 빠끔히 내밀어 봅니다. 가끔 박새가 떼를 지어 짹짹거리며 맞이 인사를 합니다. 떼를 지어 수풀을 옮길 적마다 숲이 휘청거립니다. 물오리나무가 암수 꽃망울을 맺었습니다. 양지녘 생강나무가 노란 비녀를 꽂고 이른 봄기운을 뽐내다가 깜짝 놀란 눈치입니다.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는 소나무도 무거운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긴 가지 끝이 활처럼 휘어집니다. 계곡을 흐르는 골물 소리가 더없이 맑고 투명하게 들립니다. 머릿속 상념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푸근한 겨울 설경으로만 가득히 채워집니다. 여태껏 이런 멋진 풍경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횡재를 한 기분입니다. 간간이 쌓인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가 후드득하며 바닥에 눈덩이를 부립니다. 졸졸거리며 흐르는 물소리, 그리고 산새들의 재잘거림을 빼고는 산중이 하얗게 고요의 세계로 채워져 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오르는 등 뒤, 남겨진 발자국을 따라 뽀득뽀드득 기분 좋은 소리가 정겹게 들립니다. 계곡 물줄기를 따라 탐방로가 뜸봉샘으로 이어집니다.

이 작은 물줄기가 장안산에서 내려오는 장안천과 육십령 물줄기가 모여 용담댐으로 모여지고, 다시 금산을 거쳐 대청호에서 머물다가 공주와 부여를 돌아 군산 하구를 지나 서해로 흘러드는 비단같이 아름다운 금강의 머릿물입니다. 그 물줄기가 천 리라니 참으로 긴 강입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이 고장 지명이 긴 물이란 속뜻을 품은 ‘장수(長水)’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눈 덮인 산속 탐방로 숲길을 따라 중턱에 다다르니 뜸봉샘이 나타납니다. 금강의 발원지 ‘뜸봉샘’, 해발 900미터 신무산 자락에 태곳적부터 쉼 없이 솟아나는 이 작은 샘줄기가 길목마다 모여지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비단결같이 고운 천 리 길 강을 이루었다니 마음이 경건해집니다. 뜸봉샘을 품고 있는 신무산 자락,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큰 뜻을 품고 기도하던 중 하늘에 무지개가 뜨고 샘에서 봉황이 솟아올라 새 나라를 열라는 천명을 받았다는 뜬봉샘, 설화만큼이나 장수 사람들은 신성하게 여기고 자긍심을 품고 있을 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물줄기가 천 리를 흐르면서 수많은 마을과 삶의 터전을 만들고 호서평야 그 너른 들판의 곡식을 키워내는 젖줄로 살아왔을 것입니다.

산길을 내려옵니다. 때 묻지 않은 자연생태를 잘 보전하기 위한 안내와 설명도 곳곳마다 설치되어 있습니다. 멸종위기종인 하늘다람쥐가 살고 있고, 계곡에는 옆새우나 가재도 많이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심조심 눈길을 걸어 출발점에 도착해 다시 생태관을 둘러봅니다. 보물 같은 자연을 확인하고 기억 속에 담아가고 싶은 생각입니다.

눈 오는 날의 산행은 최고입니다. 소복소복 나무의 어깨와 등을 덮고 있는 하얗게 쌓인 눈을 보면 포근함과 신비함을 함께 느끼게 합니다. 눈발이 그친 듯합니다. 생애 최고의 산행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장수, 그리고 신무산 자락에 자리를 잡은 뜸봉샘의 가치와 속내를 온몸에 담아갑니다. 겨울 산의 설경이 안겨준 선물은 오래도록 기억 속 멋진 산행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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