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사설/칼럼 칼럼

명화名畵처럼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입력 2026.04.21 12:41 수정 2026.04.21 12:41

형효순 수필가

기차를 탔다. 차창 밖이 푸르다. 지인이 보내준 수필집을 꺼냈는데 눈은 자꾸만 창밖을 본다. 벼들의 푸른 향연, 질서정연한 옥수수의 키 재기, 아직까지 모내기가 되지 않는 논들을 바라보며 주인이 궁금하다. 아마도 참외나 감자 양파를 재배하고 이모작을 준비 중이겠지. 무엇이었건 만족한 작황이었으면 좋겠다.
아버님 말씀으로는 밤꽃이 지고 밤송이가 자라 겨드랑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이면 모내기를 해도 늦지 않는다고 하셨다. 아직 밤송이가 작은 성게처럼 연한 초록색 가시를 달고 있으니 모내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햇살이 참 좋다. 들판에 간간히 사람들이 있다. 팥을 심거나 고추 줄을 매거나 풀을 뽑거나 그중 하나일 것이다. 농부와 작물은 가을을 잉태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함께 견뎌야 한다.
나란히 한 줄로 제자리에 서있는 논두렁의 콩 포기들은 농부가 그려놓은 최고의 작품이다. 수많은 화가들이 자연과 농촌의 풍경을 그렸다. 순간을 담은 사진이나 그림은 그 시대의 생활상이며 역사의 고증이 되기도 한다. 자연은 무한하게 되풀이 되지만 사람은 세월 따라 바뀌고 문화도 바뀌니 가끔은 오래 된 그림이나 사진이 따뜻하게 말을 걸어 올 때가 있다.
한국의 농촌생활상을 그린 화가로 단연 김홍도와 겸재 정선을 꼽을 수 있지만 나는 조선을 사랑한 릴리안 메이 밀러의 작품을 좋아한다. 서울주재 미국인 영사로 근무한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가 우리나라 민중의 삶의 모습과 한국의 농촌 아름다움에 반해 스케치를 하고 판화로 제작한 여성이다. 그녀의 작품 ‘노을속의 황포돗대’ ‘조선의 가을 저녁’ ‘조선의 오래된 풍습’ 은 지금 봐도 감동이다. 그녀는 또 하얀 연꽃같은 여인네들이 어떻게 그리 힘든 일을 오래 할 수 있는지 조선의 여인들에게 존경을 표한다고 했다. 한국의 여인들 지금도 사실상 ‘어머니’의 지치지 않는 사랑과 희생이 있이 이 땅의 모든 자식들이 마음 놓고 일하지 않을까.
옆 좌석에 나이 지긋한 외국인 두 명이 찔레꽃이 하얗게 핀 언덕을 지나칠 때 뷰리풀을 연발한다. 공연히 그 찔레꽃이 자랑스럽다.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고 했으니 한국의 소소한 농촌풍경이 그들 마음속에 스며들길 바래본다.
차창 밖에 오월의 훈풍이 분다. 심어놓은 벼들이 초록 물결을 이루고 있다. 한 곳 한 곳이 모두 아름다운 그림이다. 잠시 내가 농부였다는 사실을 잊고 창밖의 나를 바라보고 있다. 김을 매는 저 사람이 분명 어제까지 나였다. 감자를 캐고 옥수수를 심고 서리태를 심으면서 종종거리던. 한 걸음 물러서서 필름처럼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니 참 좋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는 명화처럼 살고 있었나 보다.
사실 농부는 많이 고달프다. 봄부터 가을까지 심고 가꾸면 손이 거칠어지고 허리가 굽어가지만 한 치의 땅도 허투루 놀리지 않는다. 그 노동을 돈으로 환산한 일 년 수확이 허망할 수 있지만 마음먹기 따라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는 곳이 농촌이기도 하다. 사진으로 치면 근사한 순간포착 한 컷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TV 화면이 바뀌듯 기차는 도시에 들어섰다. 오늘 만날 문우님 모습이 다가온다. 글을 쓴지 십 년 만에 상재된 첫 수필집을 들고 기다릴 것이다. 많이 떨린단다. 그녀가 쓴 글들 중 어느 한편이라도 누군가에게 한 폭의 추억이 되기를 바래본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오래된 사진 한 장처럼.


저작권자 주)전라매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