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사설/칼럼 칼럼

4.19혁명 66주년을 보내면서도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입력 2026.04.20 12:42 수정 2026.04.20 12:42

전대열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자유 민주 정의를 내세운 4.19혁명정신은 한국의 헌법정신으로 3.1만세운동과 함께 나란히 정립되어 있다. 광복을 이루고 몇 년도 되지 않아 북괴군의 남침으로 인하여 우리의 국토는 역사에 보기 드문 폐허로 변했다. 우리 강토가 7년동안 계속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에 입었던 피해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폐허였지만 당시의 인구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었고 농사만이 주된 산업이었던 시절이어서 근대의 피해와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6.25사변 역시 현재보다는 인구와 산업 등에 큰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문명으로 접어들어 많은 시설의 파괴는 당시의 외신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복구가 불가능한 나라’라는 표현이 적절했다고 보여진다. 이런 와중에도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외국의 원조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면서도 권력층의 부패는 도를 넘었다.
그들의 눈에는 국민은 안중에 없고 오직 권력 유지에만 눈독을 들였다.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날린 이승만은 대통령을 옛날의 임금으로 착각하여 스스로 국부(國父)를 자처하며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으로 3선 4선을 거듭하며 영구집권을 시도했다. 이기붕을 후계자로 정한 후 대통령이 임기 도중에 사망하는 경우 그에게 권력이 돌아갈 수 있도록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공작을 꾸민 것이 3.15부정선거 기획이었다. 젊은 최인규를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1년여에 걸쳐 치밀하게 부정선거 기획을 완성했다. 대통령 선거는 야당후보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의 당선이 확정되다시피 했지만 부통령 선거는 야당후보 장면을 이겨야 하는데 이기붕은 지난번에도 한 번 패했던 경력이 있어 오직 부정선거에 전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3.15 선거 날짜가 다가오자 초조한 자유당 정부는 야당 유세에 고교생의 참여를 막기 위해서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가 2.28대구 학생시위, 3.8대전 학생시위, 3.15마산의거, 3.17서울성남고 시위, 4.4전북대 시위, 4.18고대 시위를 연달아 맞아야 했으며 드디어 전국적으로 일어난 4.19혁명이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마산의거에서는 김주열학생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 바다에 떠오르자 전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여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고대생 시위를 깡패들이 습격하여 100여 명이 청계천 길거리에 널부러진 사건은 이튿날 4.19를 불러오는 진원지 역할을 했다. 186명이 경찰의 총탄에 희생되고 6천여 명이 부상 당한 참사는 교수데모로 극적인 막을 내리고 이승만의 하야로 막을 내렸다.
4.19혁명 66주년을 맞이한 서울시에서는 오세훈시장이 주관하는 기념행사를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4월18일 저녁에 개최했다. 그에 앞서 4.18 아침11시에 고대생 데모대가 깡패들의 기습을 받았던 현장에서는 4.18민주의거기념사업회(회장 김호일)가 주관하는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나는 사회자로서 기념행사의 중요성을 알리며 4.19혁명의 깊은 뜻을 되새겼다. 그런데 광화문 음악제에 오세훈 시장이 참석했을 때 연례(年例)로 주장해 왔던 ‘광화문 광장을 4.19광장으로 바꾸라“는 메시지를 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동안 여러 신문과 잡지 등 매체를 통하여 왜 광화문 광장의 명칭을 4.19광장으로 고쳐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할 기회가 없었지만 주위에 많은 이들이 둘러싸고 있어 악수를 하면서 분명하게 나의 뜻을 전달할 수 있었다. 광화문 광장을 4.19광장으로 바꾸면 ”오세훈이 역사에 빛나게 될 것이요.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긍정인지 부정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느닷없이 극우파 인사들이 신문광고에 ’이승만 광장‘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쓰고 있는 현실을 개탄해야 하는 4.19인의 입장에서 확실하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심사숙고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이승만은 4.19혁명에 의해서 권좌에서 쫓겨난 인물이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성취했던 외교나 한미동맹 그리고 독립운동 경력을 내세워 건국의 최고 공로자로 떠받드는 견해는 최고 권력자가 되어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몰려 하와이 망명 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현실과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 것일까? 목숨을 바쳐 독재와 부정을 물리친 4.19혁명의 영령들은 66년의 세월이 흘러도 원인과 결과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현실을 저승에서도 개탄하고 있지 않을까? 착잡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저작권자 주)전라매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