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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요일별 특집

[문학칼럼-시인의눈] 딱 하루만이라도

전라매일 기자 입력 2021.04.25 18:04 수정 0000.00.00 00:00

ⓒ e-전라매일
어린 시절, 버찌가 익어 갈 무렵이면 벚나무에 올라가 하루를 보냈다. 벚나무를 오르다가 여린 가지가 쭉 찢어지면 벚나무를 붙잡고 매달려 울기도 했었다. 내 울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농사일을 하다가 달려오신 아버지는 호랑이도 안 물어 갈 일을 나무에서 하고 있다고 야단을 치기도 했었다. 보리가 노랗게 익어갈 무렵이면 보리밭에 둥지를 틀고 어린 새끼를 기르던 꿩은 비가 오면 온 산이 떠나가도록 꿩! 꿩! 하며 울어 대었다. 곡우가 지나면 천수답 논 도랑에서 장딴지를 걷고 물속에서 다슬기를 잡을라치면 피라미들이 내 발로 몰려들어 물에 불은 때를 뜯어 먹었다.
자연과 더불어 살던 유년의 삶이 아버지가 잘못 파 놓은 가난이라는 구덩이에 빠져 도시로 가게 되었다. 열여섯 살의 도회지 생활은 찬 서리 내리듯 시리기만 했다. 사방이 꽉 막힌 공간에서 하루를 참아 낸다는 것은 곧 시간을 죽이는 일이었고 돈과 바꾸는 세월이었다. 발이 시리고, 어깨의 아픔을 참아 내며 날아 갈 수 있는 창문을 찾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 보았다. 남들처럼 근사한 직업을 가져보고 싶었고 호기도 부려가며 이 세상을 한번 후려 잡아보고 싶은 욕망도 솟구쳤지만, 그때마다 찾아오는 것은 좌절감이었다. 가슴에 보따리를 안고 고향 역에서 기차를 타던 날, 점점 멀어져 가는 고향 역을 바라보며 꼭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가 봄볕을 받으며 오디를 따 먹었던 그곳으로 돌아가겠노라고 다짐했었는데 나는 지금 그런 고향으로 못 돌아가고 여태껏 이방인 생활을 하고 있다.
비가 오는 창밖을 바라보다 그만 바늘이 손톱에 두 바늘이나 들어가고 말았다. 솟아나는 핏방울이 가슴에 사무치는 생채기인 양 재봉틀 위로 툭툭 떨어졌다. 고향을 떠나 지금껏 재봉틀을 붙잡고 살면서 아직은 세상에 대한 미련이 많은 탓인지 앞으로 다가올 생에 대한 안부를 먼저 물어보고 있다.
아침마다 흑석골에 있는 일터로 향하며 보는 산자락은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저 산자락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열여섯 살 소녀가 나처럼 늙어 가고 있을까? 조금 더 들어가면 외딴집과 천수답 논두렁이 나오겠지. 하루 종일 그런 생각에 잠기다 보면 보리밭이 유채꽃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산 꿩이 울고 쑥국새가 울고 개구리들의 합창 소리가 한창일 그런 좋은 세상을 등지고 살아야 함에 딱 하루만이라도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끓어오르는 갈증을 오늘은 봄비에 실려 보내고 있다.

/신영순 시인
전북시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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