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e-전라매일 |
|
권삼득은 정조·순조 때 활약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에서 권내언(權來彦)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안동 권씨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판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집안에서 파문됐다. 그는 타고난 고운 목으로 ‘사람, 새(鳥), 짐승 소리’를 터득했다 해 호를 삼득(三得)이라 한 조선 전기 8명창 중 최초의 명창이다. 특히 말이나 가마가 지나갈 때 위세를 더하기 위해 그 앞에서 하인이나 역졸들이 목청을 길게 빼어 부르는 권마성(勸馬聲) 소리제를 응용해 ‘판소리 덜렁제’(혹은 설렁제)라는 특이한 소리제를 개발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 소리제는 당시의 판소리가 계면조(설움조) 일색일 때 덜렁제라는 새로운 판소리 선율을 도입, 판소리의 표현영역을 넓히는데 큰 역할을 했다. 고음역의 소리가 연속되다가 갑자기 뚝 떨어진다거나, 저음역에서 갑자기 치솟는 음 등 소위 도약선율을 사용해 장중하고도 씩씩한 남성적 느낌을 준 것이 그것이다. 지금도 <흥부가>중 놀부가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 <춘향가>의 군노사령이 춘향을 잡으러 가는 대목, <심청가>의 남경장사 선인들이 사람을 사겠다고 외치는 대목등에 쓰이고 있다. 양반이라는 신분을 내던지고 판소리 창자가 되어, 판소리를 고도의 예술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초기의 소리꾼이다.
그러나 이러한 권삼득의 출생지에 대한 이설이 분분하다. 전북 남원시에서 발간한『남원지』만 보아도 『남원지』(1972년)에 따르면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무수리)에서 출생, 1982년도에 발간된『남원지』에는 ‘전주 태생, 노씨 외손’이라 기록되어 있고, 1992년에 발간된『남원지』에는 ‘전북 완주군 봉동 출신, 남원 주천방 노씨 외손’이라 각기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1940년 정노식의『조선창극사』에는 또 권삼득의 출생지가 ‘전북 익산 남산리’라 했고,『안동 권씨 대동보』나 권삼득의 부친 권래언의 문집인 『이우당집』에 의하면 권삼득의 출생지가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로 기록돼 있다. 이를 참고로 현지 조사를 해 본 결과, 남원시 주천면은 권삼득의 외가(무수리)가 있었던 곳으로 판소리를 수련한 곳이며, 익산은 가문에서 쫓겨난 후에 살았던 곳으로 여겨진다. 권삼득의 부친 권래언의 문집인『이우당유고집』에 의하면, 권삼득이 소리를 한다고 집안에서 쫓겨났다고 했으므로, 전라북도 익산군 남산리는 쫓겨난 후에 살던 곳 또는 처가가 있는 곳이라 보아진다.
부친의 아호는 이우당(二憂堂)인데, 이는 두 가지 근심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가 남긴 이우당집에, ‘나의 근심은 첫째, 아버지 묘를 이장하지 못한 것, 둘째, 삼득이가 내 가르침을 저버리고 술과 음악에 빠져 집을 떠나 끝내 얼굴조차 볼 수 없으니, 나는 이것 때문에 그 아픔이 간과 명치에까지 사무쳐서 마음이 울적해 걱정거리라 해 호를 이우(二憂)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아버지는 권삼득이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해 멍석말이를 시행하려 했다. 삼득은 죽기 전에 마지막 소원이니, 소리나 한마디 하고 죽여 달라고 간청을 해 허락을 받고 ‘춘향가의 십장가(十杖歌)’를 불렀다. 그 소리를 듣던 사람들이 감동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문중의 어른들이 삼득의 재능이 죽이기에 너무 아깝다 해, 족보에서 내 쫓되 목숨은 살려주었다 한다.
또 한 가지 일화는 멍석말이를 시행하려고 하자, 지금까지 소리를 해 수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웃겨왔으나 짐승들은 한 번도 그렇게 해 보지 않았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짐승을 한 번 웃겨보고 죽고 싶다고...그리해, 외양간에 매여져 있던 황소 앞으로 가서 소리를 했다. 한참 소리가 무르익자, 황소가 웃기 시작했다. 이에 문중 어른들은 짐승마저 웃기는 재주가 아깝다해 살려주었다고 한다.
권삼득은 현재 전북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 뒷산 작약골 선영묘 아래 안장되어 있다. 전라북도 도립국악원 내에 ‘국창 권삼득 기적비’와 전주시에 ‘권삼득로’가 있다.
/김동수 시인
본지 독자권익위원회 회장
사)전라정신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