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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순창군 적성면에서 출생
근호기업 김종근 대표는 순창군 출신이다.
순창군 적성면 지내리. 마을엔 체계산이 있다. 원다리도 있었는데, 그곳에 고을 원님이 살아서 붙여진 다리 이름이란다.
김 대표는 농사를 짓던 부모님 슬하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8년 생이다.
적성면 지내리엔 뽕나무가 많았다.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누에치기를 했다. 김 대표의 부모님도 누에를 쳤다. 아버지는 부업으로 뽕나무 접붙이는 일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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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때, 완주 구이면으로 이사
김종근 대표의 가족은 순창군 적성면에서 완주군 구이면으로 이사했다. 김 대표가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완주군 구이면엔 경주 김씨 집성촌이 있다. 항가리 망산마을이다. 약 70여 가구가 살았다. 그 가운데 경주 김씨가 60~70%였다.
구이면 항가리 망산마을에서 아버지는 농사를 지었다. 주로 밭농사였다.
망산마을에서는 대추가 많이 생산되었다. 대추 농사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부유했다.
망산마을 대추는 거의 전주 시내의 약초 상인들이 사갔다. 전국 각지로 팔려나가기도 했다. 가을이 되면 망산마을에 많은 상인들이 찾아왔다. 대추나무에 매달린 열매의 양을 대충 훑어보고 나무 단위로 계산해서 선불을 주기도 했다.
김 대표는 구이면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했다. 구의중학교 졸업 뒤 전주공고에 진학했다. 전기과였다.
김 대표는 구이면에서 보낸 학창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아버님 덕분에 청소년기를 배고프지 않게 보냈다. 아버님은 사업을 하시다 일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집안살림을 넉넉하게 꾸렸다. 그래서 나는 경제적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초·중·고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전주공고 졸업 이후, 김 대표는 자원입대했다. 하사관으로 강원도 인제군에서 근무했다. 5년간 최전방에서 직업군인으로 근무하다 중사로 제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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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제대 후, 볼트·너트 제조업체 입사
김종근 대표는 군복무를 마치던 해인 1984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생애 처음으로 들어간 직장은 볼트·너트 전문 제조 업체인 ‘대아공업’이라는 제조업체였다.
김 대표는 이 회사의 영업부 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자재 담당, 품질 관리 등을 맡았고, 부장으로 승진한 뒤엔 업무를 총괄했다. 1997년 2월 퇴사했다.
# IMF 때 이직한 회사, 4개월 만에 부도
김종근 대표가 대아공업을 그만두던 해인 1997년은 IMF가 발생한 해다.
그해 김 대표는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다른 제조업체로 이직했다. 대아공업처럼 볼트와 너트를 전문으로 제조하는 업체였다. 이런 제조업체의 영업 총괄을 맡았다.
그런데 이직 후 약 4개월 만에 이 업체에 부도가 났다. 공장이 경매로 넘어갔다.
“그런 위기가 나에겐 기회가 됐다. 회장님이 나를 불렀다. 회사를 도저히 끌고 갈 수 없는데, 살려볼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어차피 공장 경매가 들어오면 약 6개월 정도 시간이 흐르게 되 는데, 공장 안에 있는 모든 기계가 압류돼 있지만 사용은 할 수 있으니 6개월 동안 이걸 기반으로 삼아 회사를 한번 살려 보라고 제안했다.
당시 IMF 때문에 관련 업체들이 푹푹 쓰러지는 판국이라 다른 직장을 찾기 힘들어서 회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시절, 당시 나는 교회에 나가면 내 사업장 하나를 만들어 주시라고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그런 처지여서 회장님의 제안을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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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 때 창업한 근호기업
김종근 대표는 부도가 난 업체를 되살리는 작업에 앞장섰다. 30여 명의 직원 중 대부분은 떠났고, 7명만 남았다.
6개월 정도 지나자 압류돼 있던 공장 기계의 경매 절차가 끝났다. 경매를 받은 사람은 업종이 조금 다른 업체 대표 A씨였다.
김 대표는 A씨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사장님! 입찰을 받으셨는데, 저한테는 생명과 같은 기계인데 제게 일부 기계를 넘겨주시면 안 될까요? 꼭 성공을 해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A씨는 “맨입으로 그냥 달라고 하는거냐?”며 거부했다. “그냥 달라는 얘기가 아니다”고 말해도 A씨는 곧이듣지 않았다.
김 대표는 A씨의 집을 몇 차례 찾아가서 머리를 숙이고 부탁했다. 매번 입장을 굽히지 않던 A씨는 결국엔 김 대표에게 경매 받은 일부 기계를 헐값으로 넘겨주었다.
“당시 돈으로 내가 인계받고자 했던 기곗값은 대충 잡아도 한 1억 5천에서 한 2억 정도였다. 그 정도 나가는 기계를 2천만 원에 넘겨 달라 했으니 A씨가 거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A씨는 내게 기계를 넘기지 않으려고, 어느 날 새벽 공장 문을 잠그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A씨 집을 찾아가서 부탁했다. 그랬더니 A씨는 공장에 있는 기계 중 내가 필요한 기계를 골라서 표시를 해두라고 했다.
A씨의 지시대로 나는 기계에 표시를 했다. 정말 욕심이 나는 고가의 기계가 몇 대 있었지만 마음을 비웠다. 그런 기계에 표시를 하면 A씨가 날더러 도둑놈이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회사를 설립하는데 꼭 필요한 저가의 기계만 표시했다.
A씨가 공장을 방문했다. 내가 필요한 기계는 이것이라고 말했더니 A씨는 나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나보다 나이가 15세 정도 더 많은 A씨는 허허 웃으면서 정말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A씨는 솔직하게 말해 보라면서 혹시 저 기계도 갖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그래서 난 제게 넘겨주시면 감지덕지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A씨는 표시를 하지 않은 그 고가의 기계들도 가져가라고 했다.
과욕을 부리지 않았기에 고가의 기계도 얻게 됐다. 어떤 기계가 비싼지 A씨도 뻔히 아는데, 괜히 욕심을 갖고 술수를 부렸다면 그런 횡재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A씨의 배려로 나는 내가 살 수 없는 고가의 기계까지 여러 대 덤으로 얻었고, 소망하던대로 창업도 할 수 있게 됐다.
그 고마움에 답례를 하려고 고급술을 사서 집을 찾아가니 A씨는 앞으로 이런 거 사오지 말고 그냥 와서 인사만 하라고 했다. 이후, 나는 A씨를 은인으로 모셨다.
김 대표는 현재도 A씨와 교류하고 있다. 두 사람은 그때 맺었던 인연을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A씨를 은인으로 모시는 김 대표의 마음은 오늘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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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시흥시 시화공단의 근호기업
김종근 대표가 IMF 때 세운 근호기업은 현재 시화공단에 위치한다. IMF 때 부도가 난 회사를 함께 되살리고, 김 대표의 회사 설립을 도운 7명의 창업 멤버들은 오늘도 근호기업에서 김 대표와 함께 한솥밥을 먹고 있다.
근호기업은 창업 직후 크게 번창했다. 호주, 뉴질랜드, 일본 등의 글로벌업체들이 탐을 내는 뛰어난 특허기술을 보유한 덕분이었다.
근호기업은 건설용 타정핀, 총알핀, 힐티타정핀, 건성용 볼트, 침대·가구용 볼트, 전기·전자용 볼트, 자동차·철도용 볼트, 기타 특수 볼트·너트와 일반너트 등을 전문으로 생산해 온 기업이다. 창업 초기 근호기업이 보유했던 특허는 세계적인 타정핀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몇 년 전, 가스핀과 빔용핀 개발도 완료한 근호기업의 김종근 대표는 독실한 크리스찬이다. 35년째 안산시 부암교회에 다닌다는 김 대표는 교회에 나가면 이런 기도도 올린다고 한다.
“제가 사업을 하는 가장 큰 목적은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옵니다. 우리 직원들과 더불어서 배고프고 힘들지 않게 한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옵니다. 이렇게 살도록 저를 도와주옵소서. 우리 직원들 봉급, 단 하루도 봉급날을 어기지 않고 지급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렇게 기도를 올리는 김 대표는 지금까지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매월 15일 봉급날, 직원들 봉급을 주지 않은 적은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