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e-전라매일 |
|
예전에 난 손톱에 봉숭아물 들인 남자를 참 좋아했다. 아니, 그 남자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요즘엔 좀처럼 그런 남자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지금은 물에 개어 손톱에 바르기만 하면 2시간 안에 봉숭아 손톱이 되는 간단한 화학약품 이 나와 봉숭아 손톱이 주는 순수와 옛날의 아련함은 많이 사라진 듯하다.
내가 어릴 적엔 봉숭아물 들이는 날은 마치 잔치 전날처럼 부산하고 설레었던 기억이 난다. 예쁜 빛깔의 꽃잎을 가려 따서 잘 간수하고 피마자 잎도 부드럽게 해서 손톱을 감싸기 좋게 만들어 놓았다. 명반이라는 이름으로 할인점이나 약국에서 팔고 있는 신맛이 나는 백반은 그때는 한약방에서 팔았다. 행인杏仁이라고 해서 약재로 쓰이는 살구 씨를 주워 한약방으로 가지고 가면 그 곳에서 백반과 바꿀 수 있었다. 초여름에 버린 살구 씨를 줍기 위해 난 온종일 길가를 헤매고 다녔다.
손톱에 봉숭아물 들이는 과정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은 화목하고 평온하지 않으면 절대로 치러질 수 없는 행사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우환과 불화가 있는 가정, 사랑이 없는 가족이라면 상대방이 묶어주고 감싸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그 다정한 과정을 어떻게 해낼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봉숭아 손톱의 남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남자가 봉숭아 물 들이는 과정을 접할 수 있는 화목하고 평화로운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분명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따뜻한 사람일 것이다. 물론 어둡고 차가운 성격은 더욱 아닐 것이다. 또 봉숭아 손톱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엔 순수와 부드러움이 있을 것이고, 아집과 편견 같은 건 없을 것 같 았다. 물들인 손톱이 비록 새끼손가락 한 개일지라도…….
무엇보다 주로 밤에 하는 봉숭아 손톱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건 적어도 늦은 귀가가 습관이 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 남자의 정갈한 생활과 가정적인 성품을 엿볼 수 있고, 매우 온유하고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몇 가지 가정들이 비약적이고 다소 과장돼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다지 황당한 생각만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봉숭아 손톱을 가진 남자에게서 순수하고 깨끗한 식물성이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모든 가치관이 변하고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끝을 보는 듯 비관적이긴 하지만, 손톱에 봉숭아물 들이는 과정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특히 화목하지 못한 집에서는 그 행사가 이루어지기 쉽지 않다는 것까지. 오늘 문득 그 옛날 봉숭아 손톱을 하고서 내 앞에 서 있던 그 남자가 그리운 건 봉숭아 꽃잎이 떨어져 눕는 이 계절이 떠나가는 아쉬움 때문일까?
/최화경
전주문협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