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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안원규·정원명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안원규는 1903년 3월 3일 캡틱(Coptic)호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후,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탄생한 ‘한인합성협회’의 부회장으로서 한인사회 통합의 주요 인물이 됐다.
지방마다 학교를 설립해 교육에 힘을 기울였고, 하와이 각 섬에 지방회와 경찰서를 세웠으며, 많은 동포가 재류하는 지방에서는 농장주의 허가를 얻어 자치를 실시해 치안을 유지하기도 했다.
하와이의 한인사회가 한인합성협회로 통합되자, 북미지방의 ‘공립협회’와의 합동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힘입어 두 협회는 하나로 합해 1909년 2월 1일 ‘국민회’로 탄생했고, 이 중 하와이의 발기인에 안원규가 있었다.
안원규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부회장으로서 지방회의 조직과 회원 확보에 노력해 1909년 10월 하와이지방총회 산하에 60여 곳의 지방회와 2,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또한 1930년대 후반 독립운동을 위해 열린 ‘해외한족대회’를 계기로 설립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태평양전쟁 시기 임시정부와 미국정부의 가교를 놓는 역할은 물론이고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해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안원규는 1947년 5월 22일 하와이 호놀룰루 퀸병원에서 향년 70세로 별세했고, 그의 유해는 다이아몬드헤드 기념공원묘지(Diamondhead Memorial Park)에 안장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원명은 하와이의 에와(Ewa)농장에서 1904년부터 1908년까지 한인들을 위한 통역을 맡아 한인동포들의 각가지 어려움을 돌봐주는 등 한인사회의 지도적 역할을 했다. 초기 한인조직 ‘친목회’에 참여해 국내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동참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하기도 했다.
이후 하와이 한인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성립된 ‘한인합성협회’ 창립 시 회장으로 선출돼 하와이 한인사회 화합을 위해 노력했다. 한인합성협회 이후 통합적인 움직임을 가진 한인단체들은 자주 변모했지만 정원명은 계속해서 단체의 중요한 자리를 맡았고, 미주지역 거대통합 조직인 대한인국민회가 성립될때도 주요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대표원 등 하와이 한인단체의 주요 자리를 맡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일시 귀국했으나 1918년 다시 하와이로 건너와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1925년 1월 ‘임시정부후원회’를 조직, 회장에 선출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뒤이어 1930년 ‘한인협회’의 임시위원, 1936년 1월 ‘하와이 국민회’ 대의원회에서 참의원으로 선출됐으며, 그해 2월에는 역사편찬 위원으로 임명됐다. 1937년 조직된 ‘찬무회’의 회원으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운동을 후원하기도 했다.
정원명은 활발히 활동하는 도중 1942년 6월 2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갑작스럽게 별세했으며, 그의 유해는 오아후 공동묘지(Oahu Cemetery)에 안장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제공=서부보훈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