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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문학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관리·통제되면서 ‘식민지 종속문학’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해외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이 발표한 작품들에는 당시 한민족의 참상과 소망이 오롯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이러한 자료들을 오랜 세월에 걸쳐 수집·정리한 백제예술대 김동수 명예교수의 글을 통해 민족정신을 되살리고자 한다. /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96년 필자가 미국 U.C.Berkely 도서관에서 ‘일제강점기 항일민족시가’들을 수집하던 중 캘리포니아 몬트레이에 계시던 김원용 옹을 만나 그 분이 1955년에 집필하셨던 『재미한인 50년사』와 1988년에 발간된 『한인교회 85년사』에서 수집한 시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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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하와이 이민 생활의 참상
-이친척(離親戚) 기분묘(棄墳墓)의 / 슬픔을 뉘 알리오.
1905년 4월 6일 이민선을 타던 이홍기씨(후에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권사)는 이민선을 타던 전날 밤의 심경을 다음과 깉이 읊었다.
가만히 도모하는 행리(여행)가 밝은 새벽인데
이 밤 등불 앞에 만 가지 생각이 새롭다
조상과 부모를 모시는 인륜을 저버리고
부부의 정마저 끊은 채 홀로 미지의 외국으로 향하려는 나를
조소하는 소리마저 들으면서 눈물을 흘린다
- 이홍기, 『한인교회 85년사』, 1955, P.27
그런가 하면 당시 30세로 두 아들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 마이우 섬에 와서 일하던 최용운 여인은 만리타향에서 떠도는 이민자의 슬픔을 아래와 같이 노래하고 있다.
강남에 노든 속에 / 춘풍우선(春風郵船) 만리(萬里)하니
이친척(離親戚) 기분묘(棄墳墓)의 / 슬픔을 뉘 알리오.
새 울어도 눈물 보지 못하고 / 꽃 웃어도 소리 듣지 못하니
좋은 것 뉘가 알고 / 슬픔인들 뉘가 알랴.
- 최용운, 『한인교회 85년사』 ,1955, 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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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윤치호 「애국가」(1908년)
윤치호는 16세에 신사유람단을 따라 근대화된 일본의 현실을 체험한 후 조국의 근대화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상하이와 미국에서 근대 교육을 받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사퇴한 뒤 1906년 장지연·윤효정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였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이후 안창호 등이 주도한 평양 대성학교 교장과 대한기독교청년회 연맹(YMCA)의 이사와 부회장 및 세계 주일학교 한국지회의 회장에 선임되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곡은 원래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 때 불려진 노래다. 그런데 1908년에 재판 발행한 『찬미가』에 그가 작사한 「애국가」 세 편이 들어 있어 그 중 하나가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가 되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 마르고 닳도록 / 하나님이 보우하사 / 우리 대한 만세
무궁화 삼천리 / 화려강산 / 대한사람 대한으로 / 기리 보전하세
-윤치호, 「애국가」(1908년, <찬미가> 제14장 1절 ), 『한인교회 85년사』, p.50
3. 안창호 「거국가去國家」(1910년)
-‘훗날 다시 만나보자 나의 사랑 한반도야’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사살의 거사가 일어나자 일본 헌병대는 이것이 『신민회』의 짓이라 생각하여 대성학교 교정에 있던 도산 안창호를 즉각 체포하였다. 그를 서울로 호송하여 용산 일본 헌병대에 감금하였다. 멸 달 후에 석방되었으나 한일합방 계획을 앞둔 일본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안찬호 선생은 앞날의 승리를 약속하면서 1910년 「거국가去國家」를 남기고 망명길에 올랐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가게 하니/ 이로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나
그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간다고 설워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지금 너와 작별한 후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널 때도 잊을지오 시베리아 만주 뜰로/ 다닐 때도 잊을 지나 나의 몸은 부평같이
어느 곳에 가 있던지 너를 생각할터이니/ 너도 나를 생각하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지금 이별할 때에는/ 빈 주먹을 들고 가니 이후 성공할 때에는
기를 들고 올 터이니 눈물 흘린 이 이별이/ 기쁜 일이 되리로다 악풍폭우 심한 이때
부디 부디 잘 있거라 부디 부디 잘 있거라/ 훗날 다시 만나보자 나의 사랑 한반도야
- 안창호, 「거국가」『한인교회 85년사』, 1910. p.73
안창호(1878-1938)는 조국광복을 하려면 먼저 선진국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1902년에 부인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와 24세에 중학교에 입학, 1904년에는 신학강습소에서 신학을 공부, 1905년에는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족독립과 계몽에 힘써 <공립신문>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1907년 귀국하여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투쟁하던 중 체포되었다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거국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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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홍기의 「광복 산하가」
-조국 분단(38선)을 통탄하며
광복 후 우리나라가 모스크바 3상회의(미영소)에 의해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좌익과 우익, 남북한이 찬탁과 반탁으로 국론이 분열되었다. 이에 미국의 제안으로 UN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소련측이 UN 위원단의 38선 이북으로 넘어오는 것을 반대하여 결국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홍기 권사는 당시 남북분단의 슬픔을 아래와 같이 토로하고 있었다.
광복한 산하에 큰 바람이 일어나니
겁먹은 구름은 걷히기를 다하고 해 바퀴가 붉더라.
입법하는 것은 백성이 주체가 되었고
다스리는 권한은 표결로 맡길 영웅을 뽑지.
성심으로 국면을 창립하는 이는 하지 장군이요
반목으로 비방하는 것은 적색 아이들이지.
미국에 있어 분당만을 일삼던 이 모가
외람되이 공복에 당선되어 내 마음이 차지를 않네.
- 이홍기, 「광복산하」,『한인교회 85년사』,1948. 8.15
북쪽에서는 이에 앞서 1947년 2월에 이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있다가 1948년 9월9일에 김일성을 주석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로 인해 일시적인 경계선에 불과했던 38도선이 이제는 두 정부에 의한 국경선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이데올로기를 달리하는 두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우리민족은 해방의 기쁨과 함께 조국 분단이라는 새로운 비극의 역사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