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서영
전라매일 편집위원장
전주교대 평생교육원 시낭송 전담교수
비 내리는 지리산, 용기를 내어 비옷을 입고 출발, 걷고 걷는다.
숨이 차오를수록 마음이 점점 비워졌다. 지리산은 처음부터 만만하지 않았다.
꾸준한 오르막, 굽이굽이 이어지는 능선, 끝도 없는 돌계단.
숨이 차올랐고, 땀이 눈가를 적셨다.
처음엔 정상을 생각했고, 나중엔 단지 한 걸음 한 걸음이 목표가 되었다.
이상하게도 몸이 지칠수록 마음은 점점 단순해졌다.
어제의 걱정도, 내일의 불안도, 그저 지금 이 발걸음 앞에선 모두 흐릿해졌다.
등산이 아니라, 마음을 덜어내는 시간이었다.
비는 서서히 그치고, 지리산의 물은 내린 비로 올라가는 내내 폭포를 만들고 있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경치가 바뀌었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하늘이 가까워졌다.
사람들은 적어졌고, 말도 줄었다. 대신 마음속에 웅장한 침묵이 채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마지막 돌계단을 넘었을 때, 지리산 천왕봉의 정상석이 눈에 들어왔다.
숨을 고르며 정상을 딛는 그 순간,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입으로는 침묵, 마음으로는 환희였다.
그것은 단지 산 하나를 넘은 기쁨이 아니었다.
‘나는 여기까지 왔다’는 존재의 확인, 나를 버티며 살아냈다는 실감,
그것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동이 되었다.
처음부터 지리산은 나에게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나이를 생각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 무릎 관절은 성할 때 아껴 써야 한다는 나이 많은 선배 산 매니아들의 걱정, 밤새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빗소리.
아침까지 산청에 도착할 때까지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산청까지 가는 차 안에서 ‘그래도 출발선까지 가서 결정하자’는 의견, ‘그냥 돌아가자’는 의견들. 그래도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올랐다.
정상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한 가지 깨달음이 찾아왔다.
정상은 단지 상징일 뿐이었다.
진짜 정상은 수없이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을 넘긴 과정에 있었고,
걸음을 멈추지 않은 나의 의지와 꾸준함에 있었다.
천왕봉에서 본 아침 햇살은 황홀했지만, 그보다 빛났던 건
풍경을 마주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를 견뎌온 나였다.
“삶도 결국 그런 것일 것이다.”
지리산을 내려오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삶도 결국은 산과 같다고. 고되고 숨차고, 때론 의미 없어 보이지만
그 길을 묵묵히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도착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꼭대기에 올라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걸었던 모든 길이 곧 내 삶의 증거가 된다.
지리산은 그날 나에게 단지 풍경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쳐주었다.
산을 내려오면 일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내 안에 하나의 산이 생겼고, 그 산을 넘었던 나를 나는 기억한다.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숨이 차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날의 지리산을 떠올릴 것이다.
나는 할 수 있고, 나는 이미 한 번 그걸 증명한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다시 걷는다.
어쩌면 오늘도 삶이라는 또 하나의 산을 오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리산 정상의 침묵
저기,
구름위로 고개를 내민 산이 있다
그 이름 , 지리산 천왕봉
발아래 천길 낭떠러지
세상등지고 싶은자 오라
세상 더 살고 싶은자 오라
꼬 끝에 달콤한 바람이 앉아있다
눈을 감는다
돌계단 하나 하나의
어제를 딛고
바람 한 줄기마다
내일을 떠올리며
결국,
이곳까지 왔다
하늘과 땅이 포옹하는그 순간에
세상 가장 높은 고요 속에서
나는 묻는다
나는 어디에서 와
무엇을 위해 여기 서있는가
지리산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바람이 스쳐가며 그 침묵을 시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