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사설/칼럼 칼럼

선생과 스승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입력 2025.11.03 13:17 수정 2025.11.03 01:17

정성수 본지 논설위원/명예문학박사

오늘날 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없다’고 ‘사도는 땅에 떨어지고 학교는 지식을 파는 장소로 전락해 버렸다’고 개탄과 자조적인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이 말을 곱씹어 보면, ‘선생’과 ‘스승’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글을 가르치는 선생이고, 하나는 사람을 가르치는 스승이다. 임무는 선생은 글만 잘 가르치는 일이 주가 되고 스승은 행실이나 도덕을 가르치는 일이 주다. 지식知識만을 가르치는 선생에 비해 지육智育과 덕육德育을 함께 가르쳐 사람을 만들어 가는 선생이 바로 스승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승은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이란 뜻만이 아니라 삶의 지혜까지도 가르치는 진정한 선생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선생’이나 ‘스승’ 모두 가르친다는 점에서는 같다. 선생은 단지 ‘직업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이고 스승은 삶의 본을 보여 ‘제자들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이끌어 주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지식전달을 잘하여 많은 학생들을 좋은 상급학교로 진학시키는 유능한 선생을 원한다, 한편에서는 이상적인 차원에서 학생들을 바른 인간으로 키우는 참다운 스승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이 사실이다.
참다운 스승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모범적인 생활이어야 하고, 자기희생이 있어야 하며 제자들은 물론 학부형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 다가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제자들을 엄하게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가정에서 ‘엄부자모嚴父慈母’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학교에서도 엄함과 자애로움이 조화를 이룰 때, 교사는 지식만을 전달하는 선생이 아니라, 삶을 이끄는 진정한 스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교사가 엄부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先生은 ‘먼저 先, 날 生’으로 문자적 의미로만 보다면 먼저 태어 난 사람이다. ‘先’자의 구성이 ‘소 우牛’ 아래에 ‘사람 인儿’이다. 글자로만 본다면 소 같은 사람이 선생이라는 뜻이다. 이는 ‘소처럼 어질고 근면해야 선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승은 한자로 ‘사師’다. ‘스승 사師’를 파자破字하면 ‘언덕 부阜’와 ‘빙 두를 잡’이 된다. 그러므로 교사의 참의미는 ‘가르친다(敎)’는 기능적인 면이 아니라 언덕처럼 ‘우러러 볼 분(師)’이라는 인격적인 면에서 찾아야 한다. 스승이 없는 세상은 희망이 없다. 스승이 없다고 한탄만 하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없다. 진정한 스승은 평범에서 비범을 찾아내고 비범 속에서 보편적 질서를 찾아내야 한다. 그런가하면 비범한 것을 보편적 생활에서 쓰게 하고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높여줄 수 있어야 한다. 스승은 도처到處에 있고 가르침은 사방에 널려있다. 심리적으로 깨어 있어 준비된 자는 언제든지, 어디서나 지혜의 화신化身을 만날 수 있다. 참 스승을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순전히 자신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팔을 잘라 도道를 구했다’는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는 신광神光이 달마의 제자가 된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달마가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이란 긴 세월 동안 면벽 수행하던 한겨울 엄동설한에 신광神光이 달마대사를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나 달마는 면벽한 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신광은 눈 내리는 긴 겨울밤을 추위에 떨며 인내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달마는 하룻밤의 얄팍한 덕으로 지혜를 얻고자 하느냐며 꾸짖었다. 그 말을 들은 신광은 칼을 빼어 왼쪽 팔을 잘라 구도의 결심 의지를 보였다. 이때 땅에서 파초 잎이 솟아나 팔을 받쳤고 이에 감동한 달마는 신광의 입문을 허락하여 제자로 삼고 혜가慧可라 하였다. 혜가는 달마의 가르침을 받고 중국 선종의 제2대 조사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스승은 아무나 제자로 받아드리지 않는다’고 시사한 바가 크다.
불가佛家의 인연설에 의하면 사제지간의 인연이 한 가정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보다 더 큰 인연이라고 한다. 스승은 제자를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가르쳐 주는 인연이라서 더 중하게 본 듯하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다는 것은 금수만도 못하다는 뜻이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한 몸이다’라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와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가 하면 공자의 ‘3인행三人行이면 필유아사必有我師’라는 말처럼 3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중에 한명은 반드시 본을 받을만한 사람이라는 것으로 여기서 본받을 만한 사람이 바로 스승이라는 뜻이다.
선생은 직업으로 보수를 받고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이미 정해진 제자를 거느리고 이끌며 제자를 삶의 방편으로 삼는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 분투를 하고 경쟁에서 승자가 되라고 독촉한다. 선생은 남보다 출세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고 세상사는 요령을 배우라고 한다. 입학으로 시작해서 졸업으로 끝나면 그 뒤의 책임은 없다. 선생은 머지않아 제자를 잊어버리고 유산과 아들딸을 남기고 떠난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은 사람이다. 요즘 사람들은 스승보다 선생을 더 찾고 스승보다는 권력과 돈을 찾으며 권력과 돈이 얼과 넋 보다 더 중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선생과 스승은 크게 다름에도 그것을 모르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진정한 스승은 직업일 수 없고 삶 자체를 제자와 더불어 살며 먼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면서 덕을 쌓아야 한다. 이런 스승은 댓가 없이도 즐겁게 일한다. 제자들에게 정도로 살아가라고 주문하며 인물을 양성하는데 혼신을 다 한다. 그런 스승이야말로 제자가 학문에 입문하는 순간부터 일평생을 책임지는 인격자다. 영혼을 제자에게 물려주기 때문에 스승은 영원하다. 그래서 하늘과 같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지혜가 있는 도덕적 인간 구현이다. 차가운 이성 보다는 따뜻한 감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지식을 통해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참된 교육이다. 독수리의 눈과 사자의 심장을 알게 하고 이들을 통해서 최종 목표에 도달하게 하는 스승은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밝고 참되고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스승의 음성을 기억해야 한다. 휘발유는 자동차를 굴러가게 하지만 자동차가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듯이 스승은 자신을 섬겨달라고 주문하지 않는다.


저작권자 주)전라매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