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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칼럼

망중한(忙中閑)에 들다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입력 2026.03.15 11:27 수정 2026.03.15 11:27

유인봉 시인 / 수필가

만물이 기지개를 켠다. 경칩 지나 산촌에도 샛바람이 불고 겨우내 두꺼운 얼음장을 뒤집어쓰고 숨죽여 흐르던 개울물이 제법 목청을 돋우어 간다. 바위틈에서 쫄쫄거리는 작은 물방울이 골골이 모여 물길을 이루고 다시 내를 이루고 강으로 가는 길을 낸다. 자리를 바꾸어 가며 노래하듯 흐르는 물소리에 머릿속 맑아졌다. 재를 넘나들던 나무꾼들이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파놓은 옹달샘에 아침 산새들도 내려와 목을 축이고 갔다. 지난밤 내린 봄비로 먼 산에 희끗희끗 보이던 잔설도 밤새 자취를 감추었다. 방죽 머리 치렁치렁한 수양버들 가지가 촉촉하게 잘 빗어 내린 여인의 찰진 머리 자락 같다.
수풀 속에서 짹짹거리던 새 떼가 늘어진 덤불 사이를 옮겨 앉을 때마다 사위가 출렁인다.
세상 소유가 쓸모없는 공간에서는 욕심도 걱정도 사그라지는 것인가 보다. 어제의 염려와 근심이 저 먼 바깥세상의 아득한 일처럼 느껴진다. 콘크리트 도심 속에서 단단하게 굳어버린 마음도 말랑말랑해졌다. 지구촌 한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공포나 코로나 확진자 숫자도 치솟는 기름값 이야기도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반백년동안변하지않는산과하늘개울물은그자리그대로다.와닿는 것은 오로지 얼굴을 스치는 바람과 새소리, 물소리 그리고 잔잔한 수목의 물결만이 있을 뿐이다. 생각이 단순해지고 여러 갈래의 마음도 하나로 모인다.
십년 전 봉화산자락을 밀고 내려온 오얏재 언덕에 흙냄새 풀풀 나는 텃밭을 만들고 여섯 평 오두막을 들였다. 오두막 옆으로는 반석 거리에서 좁은 수로를 따라 사시사철 물이 흐른다. 수로를 거슬러 오르면 끝없이 계곡을 따라 화강암 반석이 펼쳐지고 그 위를 수정 같은 계곡물이 흐른다. 봉화산 깊은 골짜기에서 샘 솟는 물길이 불무골 성지골 서당골 물길과 합쳐지면서 사시사철 물줄기가 마르지 않는 소하천을 이루고 있다. 서너 마지기 남짓한 텃밭에는 사과나무를 심었다. 은퇴 후 닷새는 도시, 이틀은 시골 생활하면서 오얏재 날망의 오두막은 유일한 쉼터가 되었다. 생활에 가장 기본적인 가재도구만 들여놓았다. 선풍기 한 대에 이부자리 그리고 전자레인지와 밥통과 딸이 학생 시절 자취방에서 쓰던 허리춤 키만 한 냉장고 한 대가 전부다. 필요한 것은 그때그때 사다 쓰거나 주변에서 현지에서 구해 쓴다.
틈만 나면 봉화산을 오른다. 골물을 따라 무작정 걷는다. 중학 시절 방학 때마다 풀 짐과 나뭇짐을 지고 드나들었던 나뭇길을 따라 임도가 잘 닦여져 있다. 철철이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간간이 바람결에 실려 오는 솔 향기로 가득 채운다. 우리는 누구나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으로 마음과 생각이 크게 지배받는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심란할 때도 오두막에서 머물다가 산중에 발걸음을 들여놓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생각도 단순해진다.
산중의 수목은 가장 훌륭한 스승이다. 초록빛 여름과 화사한 가을을 보내고 나면 스스로 이파리 떨구어 겨울을 준비한다. 그리고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소리 없이 가장 낮은 곳으로 돌아간다. 우리네 삶은 어떠한가. 서슬 퍼런 세상 속에서 승자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좌우 돌아보지 않고 방향도 모르고 달려가는것 아닌가? 한철 동안 거에드는 절집의 수도승 처럼 가끔은 바깥 세상과 단절된 나만의 공간에서 돌아보고 쉬어감이 필요하다. 새삼 여섯 평오두막이 금쪽같은 안식처로 느껴진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 세상 등질 때 남은 것 모두 다 세상에 두고 가야 할 진데, 노후 준비를 한다고 허리띠 졸라매고 오로지 돈 버는 일에 너무도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때늦은 생각이 든다.
어찌 생각하면 요즈음의 젊은이들처럼 내일 일은 내일에 맡기고 오늘 주어진 하루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에 투자하면서 사는 것이 현명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더 나은 내일의 풍성한 삶을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는 일은 필요하고 더 없이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내일 일도 알 수 없을 진데 미래를 위해 비축하고 쌓아두는 어리석음은 버려도 좋다는 생각이든다. ‘가진것이 많으면 져야 할 짐도 무겁다’라는 속담이 생각난다. 단순해져 보자. 새삼 텔레비전 없는 여섯 평 오두막이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든다. 좀 더 가볍게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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