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봉 시인 / 수필가
온통 초록이다. 들녘은 파도처럼 물결치고 산자락마다 연둣빛이 번지고 있다. 매화나무가 밀려오는 봄기운에 못 이겨 톡톡 꽃봉오리를 터뜨리며 봄을 재촉한다. 이에 질세라 울타리마다 개나리가 치렁치렁 노란 긴 머리를 흔들어댄다. 만사 제쳐 두고 온전한 자유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요즈음 머리가 아프다느니 허리가 아프고 담이 결린다며 TV를 끼고 ‘방콕’을 즐기고 있는 아내에게, 벚꽃이 하동 포구까지 올라왔으니 이번 주가 산수유꽃이 절정이겠다고 바람을 잡는다. 아내도 지난주 보은 산성에 오르면서 분분하게 핀 진달래를 보고는 꽃구경 가자는 제안을 두말없이 받아들인다.
차 머리를 남으로 돌린다. 왠지 이른 봄에 여행하면 남도의 들녘이나 강으로 이어지는 포구가 떠오른다. 그곳에 가면 상긋한 봄을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봄은 눈으로 봄빛을 보고, 입으로 맛보고, 온몸으로 느끼는 계절이다.
매화마을을 통과해서 차량은 다시 섬진강을 거슬러 오른다. 구례 들녘이다. 보리와 밀이 차디찬 겨울을 견디고 파릇하게 펼쳐진 풍경이 펼쳐진다. 봄기운이 황량한 들판을 연초록으로 채색하고 있다. 겨울에 바라보는 들판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소멸한 듯한 삭막 그 자체였는데, 봄기운이 뿌리를 깨우고 씨앗을 틔워 생명을 하늘로 밀어 올리고 있다. 구례 중에서도 산수유마을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노랗게 물감이 번진 산수유 계곡을 걸어본다. 온몸에 노란 물이 번지고 있다. 노랑은 봄빛이다. 지리산 자락에 산수화 한 폭이 걸려 있다. 돌담과 산수유꽃이 절정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상춘객들이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을을 내려서니 그림자가 길어지고 허기가 돈다. ‘다슬기 수제비 전문’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아내가 되돌아 나온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문을 닫는 중이란다. 발걸음을 돌려 차에 오르는데, 아저씨가 뛰어온다. 들어오란다. 그냥 보내드릴 수 없다며 식사를 준비해 주겠다는 것이다. 두 분의 마음이 참 따뜻하다.
식사를 마치고 따뜻한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오른다. 몸도 피곤하고 다리도 뻐근하다. 그렇지만 온몸에 봄을 듬뿍 담았으니 수지맞은 일 아닌가. 삶의 여정에서 여행과 쉼은 생의 간이역 같은 것이다. 때로는 준비 없이 무작정 몸만 가지고 떠나는 여행이 좋다. 계획을 짜고 정보를 수집하고 보따리를 싸는 번거로움이 없어서 좋다. 특히 몸의 감각 세포로 느껴보는 재미가 있다.
첫 도착지는 낙안읍성이다. 성곽 안팎의 옛 초가 가옥들은 최대한 잘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지금도 성안에 살고 있다. 역사와 문화, 전통을 지켜가려는 마을 주민들의 높은 의식이 돋보인다. 너른 들판과 평화롭고 아늑한 풍경, 성내 마을에 들어서면 시간을 거슬러 조선시대의 공간으로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잘 보존된 돌담과 토담, 초가지붕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곽을 한 바퀴 돌고 성내 골목골목을 돌아보다 보니 허기가 진다. 벌교 지역의 특산물인 꼬막 정식으로 허기를 달랜다. 여유롭게 차 한잔을 하고 광양 매화마을로 차 머리를 돌린다. 일부러 구불구불한 국도를 택한다. 고개를 오르내리고 굽이진 골짜기를 지난다. 수줍게 연분홍 얼굴을 내민 진달래가 마음을 휘어잡는다. 마을 울타리마다 노란 개나리가 긴 머리를 흔들며 봄을 자랑한다. 산색은 벌써 연둣빛을 띠기 시작했다. 들녘마다 논밭을 갈아엎는 트랙터 소리가 요란하다.
순천 경계를 벗어나 광양 매화마을로 들어서는 드넓은 주차장은 상춘객 인파로 빈자리가 없다. 축제가 끝났음에도 입구부터 대기 차량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코로나 거리두기가 해제되자 사람들이 산과 들로 쏟아져 나온 모양이다. 매화는 절정을 지나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봄에 떠나는 여행은 잠자던 온몸과 마음속 감각을 깨우는 충전과 회복의 시간이다. 옆자리에 앉은 아내의 잠든 얼굴이 행복해 보인다. 다슬기 수제비를 맛있게 끓여준 가게 아주머니의 따뜻한 배려가 긴 여운으로 남는다. 경쾌한 팝송이 흐른다. 워털루~ 워털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