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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칼럼

빛바랜 사진 한 장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입력 2026.05.14 13:30 수정 2026.05.14 01:30

유인봉 시인 / 수필가

이사 오면서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던 사진 뭉치들을 한데 모아 빈 상자에 담아 가지고 왔다.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시간 나면 앨범을 사다가 멋지게 정리해 두고 싶었다. 올봄에 앨범을 두 권 구매해서 사진 정리를 해 보았다. 사진이 생각보다 많아서인지 절반도 못 하고 남겨 두었다.
따듯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길게 자리를 깐다. 남겨 두었던 사진을 다시 정리해 보겠노라고 사진을 펼쳐 본다. 탁자 위에 놓인 사진 더미를 한 장 한 장 살펴보는 데 다양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그러다가 눈에 번쩍 들어오는 사진 한 장을 발견하였다. 생전에 아버지의 사진이었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막내 여동생과 포옹하며 허연 이를 드러내고 싱긋이 웃고 있었다. 아마도 어느 명절날 고향에 왔다가 돌아가는 용인 막내딸을 안아주면서 찍어 놓은 사진인가 보다. 중절모를 쓰고 잿빛 점퍼에 운동화를 신고 있으셨다.
아버지는 생전에 둘째 며느리를 많이 챙겨 주시고 누구보다도 살갑게 대해 주셨다. 그 어렵던 1980년대 초 무렵일 것이다. 부모님께서는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는지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남다르게 많으셨다. 동생들을 줄줄이 전주로 유학 보내야 했는데 하숙시킬 처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전주에 사는 피붙이라고는 농협에 다니는 작은아들 하나 있었다. 어머니의 자식들뿐만 아니라 고모님과 당숙 댁에서도 전주로 자식들 유학을 보내면서 줄줄이 모두 둘째 자식한테 거처를 맡겼다.
남동생이나 여동생은 공짜로 떠맡았고, 사촌 조카들은 쌀이나 하숙비로 쌀 다섯 말 값을 받았다. 보통 하숙비의 절반 정도인 밥값만 주신 셈이다. 지금이야 어림도 없는 이야기라고 하겠지만, 그 시절은 도시에 사는 형이나 누나가 있으면 그 밑의 동생들은 자동으로 그 형이나 누나가 데리고 있어야 했다. 그런저런 이유로 아버지나 어머니께서는 시골에서 푸성귀나 고구마 같은 농산물도 챙겨다 주시고는 하셨다.
동생들도 모두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 결혼하고 난 뒤에도 아버지는 전주 나들이를 곧잘 하셨다. 덕진 호반촌에 노인당 등록까지 해 두시고 거의 매달 전주 걸음을 하셨다. 한 번 나오시면 보통 사나흘 계시다 가셨다. 나오실 적마다 항상 둘째 아들네 집에서 머물기를 고집하셨다. 아마도 둘째 며느리가 편하고 투정 없이 잘해 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아들도 그렇게 잦은 걸음을 하시는 아버지가 자기 아내에게 다소는 부담스럽다고 느끼고 있었다.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그런 잦은 전주 나들이를 두고 핀잔을 주시기도 하였고, 전주 둘째 아들네 집에 가면 하룻밤만 주무시고 오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어머니께서는 바쁜 농사철에 해야 할 일도 많은데 농사일을 다 맡겨 놓으시고 전주 나가시는 것이 못마땅하기도 했고, 둘째 며느리한테 미안하고 부담스러워서 그런 반대를 하셨을 것이다.
그러더니 일흔이 넘어서 어느 해부터인지는 아버지께서 전주 걸음을 뚝 끊으셨다. 그리고 전주에 오실 때는 꼭 어머님과 함께 오셨고, 하룻밤 주무시고 가시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집에 오신 지 두어 시간 지나면 집에 가야 한다고 어머니를 재촉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나이가 드시면서 기억력도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도 매일같이 중학교 앞에 있는 논배미까지 걸어 내려오셨다가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시고는 하였다. 매일 습관처럼 하루에 한 번 거의 매일 그 길을 오르내리셨다. 그 이유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옛 농사짓던 시절이 그리워서 오르내리게 되었고, 그것이 습관처럼 굳어진 것일까? 아버지는 그 질문에 의사 선생님이 운동해야 한다고 하기에 운동하고 있는 거라고 대답하셨다.
고향 집을 찾을 때 아버지가 안 계시면 습관처럼 오가던 그 길을 따라가면 아버지는 늘 그 길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었다. 어떤 날은 중학교 울타리 화단 길에서, 어떤 날은 반석 거리 오르막길 돌팍에서, 그렇지 않으면 구부정한 허리에 변함없는 잿빛 중절모를 쓰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을 길을 오르고 계셨다. 여름날이면 하얀 모시 적삼에 둥근 뿔테안경과 잿빛 중절모를 쓰고 하얀 고무신 대신 운동화를 끌며 배착배착 걷는 모습이 가냘프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아버지와 아내는 애틋했던 기억이 많았다. 아들이 직장에 출근하고 나면 아내는 아버지와 함께 장터 구경을 종종 함께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반찬을 손수 만들어 대접해 드리고, 옷가지도 재래시장에 가서 사 입혀 드렸다. 아버지께서 전주 병원에 다니실 때도 항상 아내가 예약하고 모셔 오고 모셔다드렸다. 아버지께서는 둘째 며느리만 찾으셨기 때문이다.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계셨을 때도 낮에는 모두 직장생활을 하고 있기에 낮에는 오로지 둘째 며느리가 돌보아야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버지는 점점 어린아이처럼 되어 갔다. 뇌 사진을 찍어 보니 뇌가 아주 쪼그라들고 작아져 있었다. 어느 날은 고향 집을 올라가는 길에 힘겹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을 길을 오르고 계신 아버지를 발견하고 차를 세워 태워 드렸더니, “참, 고맙네요. 뉘신 줄 모르나 참 착한 사람들이 다 있네요.”라며 연거푸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아들 내외라고 이야기하니 그때뿐이다. 마음이 슬퍼졌다.
누군가가 ‘갈 때가 되면 자식한테도 정을 뗀다.’고 했다.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차츰 기억력과 인지력이 떨어지는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가면 둘째 며느리를 어린아이처럼 졸졸 붙잡고 따라다녔다. 약 처방전 받아 올 터이니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 앉아서 기다리고 계시라 일러 두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꼼짝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계셨다. 그러다가 며느리가 나타나면 아이가 엄마를 발견한 것처럼 그리도 좋아하셨다.
어느 날 아내가 아버지 다니시던 병원에 갔다가 키가 작고 잿빛 점퍼에 중절모를 쓰신 어르신이 지나가기에 아버지인 줄 착각하고 달려가 보았더니 다른 분이더라는 이야기였다.
아내와 함께 이런저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내면서 지난 추억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면서 아내는 아버지 생전에 받은 사랑과 더 잘 보살펴 드리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아버지 제사가 이틀 앞으로 다가오니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진다. 다른 자식들도 아버지가 보고 싶을 것 같아서 아버지의 빛바랜 사진을 가족 단톡방에 올렸다. 금세 아버지와의 추억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올라왔다. 아내는 유독 아버지와의 기억이 많은가 보다. 눈가가 촉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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