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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칼럼

시인의 골프는 나비의 꿈이었다

전라매일 기자 입력 2021.06.28 18:43 수정 0000.00.00 00:00

일찍이 공자는 시를 일컬어 사무사(思無邪)라 했다. 사악함이 없는 생각은 시인이 생명처럼 간직하는 인생론적 철학이기에. 이러한 철학은 골프를 인생이라고까지 비유하는 우리들의 견고한 사고의 바탕을 제공 해
준다. 그러고 보면
결국 골프도
사무사(思無邪)다.

ⓒ e-전라매일
도대체 시인(詩人)이 골프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괴변인가? 더구나 호접몽(胡蝶夢)이라니? 생뚱맞을 수도 있겠다. 골프채를 잠시 놓고 시의 숲으로 들어가 한 번쯤 시인의 노래에 귀 기울여 보자는 애기다. 시는 본디 영혼의 노래였으므로. 그러면 오늘도 고독한 삶의 거리에서 서성이며 적어도 ‘골프가 인생이요, 인생이 골프’라고 믿는 우리들에게 들려오는 영적 교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론적인 인생 골프의 지혜라는 화두를 풀어내기 위해 우선 필자가 준비한 체험사례를 식탁위에 올려 드린다. 다만, 골프는 곧 멘탈 게임이라는 골프헌법 1조를 믿지 않는 독자라면 본 칼럼을 휴지통에 버려도 딴죽 걸지 않으리라.
먼저 꿈속으로 안내한다. 필자도 한 때는 골프에 목숨 건 적도 있었다. 허리를 다쳐 병실에 누워 있어도 천장의 파란 잔디에는 오직 하얀 골프 볼들만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빨간 홀컵 깃발이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왼 종일 나부끼고 있었으니까. 노트북을 열어 그날의 점수 기록지를 꺼내어 본다. 오! 내 나비 한 마리 골프채 끝을 너울거리더니 가벼이 날아오른다. 한치 앞도 분간이 어려운 새벽안개 속 첫 타석 골프 티잉 라운드. 드라이버를 휘두른 순간 공과 내가 몰아일체(沒我一體)로 한 몸이 된다. 내가 공이 되고 공이 내가 되고 나비되어 호접몽(胡蝶夢)의 세계로 날아간다. 장자가 휘둥그레 잠에서 깨어났으리라.
공보다 내가 먼저 홀컵 속으로 들어가 볼을 기다리고 있다. “홀인원이다!” 보기플레이의 벽을 결코 넘을 수 없다고 골프채를 던져 버리기가 일쑤였던 현실속의 아마추어가 홀인원을 기록하다니. 영원히 잊지 못할 무의식 세계의 ‘호접몽(胡蝶夢) 골프’였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필자가 과장하는 것 같은가? 혹여 골프를 취미로 즐기는 사람이 꿈속에서라도 홀인원을 기록했을 그 누구에게든 묻고 싶다. 방금 필자가 체험한 ‘호접몽(胡蝶夢) 골프’가 괴변이라고 정직하게 말 할 수 있느냐고.
다음은 필드 현장이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중견 시인과의 동반골프가 성사된 것은 몇 해 전 일이다. 필드로 가는 승용차 속에서 그는 캐디백 속에서 손때 묻은 누런 메모장을 꺼내 연신 한 구절만 마법의 주문을 외우듯 읊조리고만 있었다. “오! 다리 없는 나의 새여 ” 골프장에는 어디에나 당신만의 다리 없는 새가 존재하며 그와 한 몸 되어 18홀을 함께 날아다닌다고 했다. 그의 드라이버 샷은 깃털처럼 부드러웠지만 도대체 저런 어설픈 셋업 자세와 망측스런 스윙 폼으로 파4홀을 어떻게 2타에 그라운드 홀컵 가까이 안착시켜 이글(eagle)을 낚아 챌 수 있단 말인가? 비기(祕機)가 궁금했다.
시의 첫 대문은 신(神)이 암시해 줄뿐이며 끝 연을 닫을 때에는 강한 여운을 남겨야 한다고 그는 창작 시론을 펼쳐 보일뿐 경기에만 집중했다.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자 다리 없는 새가 곧 당신의 분신이며 첫 홀 첫 타석은 오로지 그 다리 없는 새와의 영적 교감으로 마음을 비우고 허공을 날아오르듯 가벼운 샷을 날릴 뿐이란다. ‘호접몽(胡蝶夢) 골프’를 실존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홀로 다가갈수록 피곤한 골프채를 어깨위로 곤두세울 수 있는 것도 역시 저 다리 없는 새로 공을 넘긴다. 정신(멘탈)이 핵심이라는 경구로 들렸다. 시인 김소월은 하찮은 생명이라도 그 탄생을 위해서는 우주적 참여가 있어야 함을 국화 한 송이를 통해 보여주었다. 그날 다리 없는 새가 국화 한 송이를 물고 시인의 몸속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골프는 80%가 멘탈이라고 입을 모으는 골프 도사들의 명언은 위 팔순노인의 비밀 병기에 힘을 실어준다. 벤 호건은 골프에는 나이가 없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에 잭 니클라우스는 오로지 자신을 믿는 집중적인 정신무장을 덧댄다. 아놀드 파머는 골프에서의 승리는 체력보다 정신력과 강인한 인격에 있음을 견고하게 고집한다. 타이거우즈가 정리한다. 장애물을 만날 때 마다 독특한 미소를 짓는다. 그만의 맨탈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의 방증이다.
여기서 자못 궁금해진다. 위 언더파를 치는 팔순 시인은 과연 골프 도사들의 쑥덕거림에 고개를 끄덕였을까? 추론에 맡긴다. 독자들은 이미 골프헌법 1조를 알고 있으므로. 의외였다.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유유히 비상하는 그‘다리 없는 새’를 가리키며 미묘한 미소만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솜털 같은 흰 구름만 흐르고 있을 뿐인데. 그는 매 홀마다 마치 적멸에 들듯 사뿐사뿐 잔디를 지르밟으며 리드미컬한 율동을 보여주었다. 아! 저 깃털 같은 리듬이라니! 골프는 정신력과 리듬의 만남이라는 비기(祕機)를 도사들은 놓치고 있었다. 그 골프 치는 시인은 필드의 무용수였던 것이다.
정리해보자. 일찍이 공자는 시를 일컬어 사무사(思無邪)라 했다. 사악함이 없는 생각은 시인이 생명처럼 간직하는 인생론적 철학이기에. 이러한 철학은 골프를 인생이라고까지 비유하는 우리들의 견고한 사고의 바탕을 제공 해 준다. 그러고 보면 결국 골프도 사무사(思無邪)다. 시의 숲에서 보여 준 시인의 춤과 노래는 결국 ‘다리 없는 새’와의 합일(合一)을 가능케 해준 호접몽(胡蝶夢)과의 영적인 교류였다 할 수 있으므로.

/나병훈
본지 독자권익위원
문학평론가
미래농업전략연구원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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