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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한인애국단에서 일본군 고위 관료 처단을 위해 군사교육과 의열투쟁을 주도한 안경근·이덕주·최흥식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습니다.
안경근 선생은 1924년 중국 운남성 운남강무학교를 졸업, 만주 정의부에 참가하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도 근무하면서 군사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1931년 한인애국단에서는 윤봉길의사 의거 이후 일제의 독립유공자 탄압을 피해 김구 선생 신변을 보호했습니다.
선생은 황포군관학교 교관, 1934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걸쳐 군사인재를 양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은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 창설의 핵심 세력이 되어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덕주 선생은 대한교민단 산하 의경대, 상해한인독립운동청년동맹, 상해 한국독립당, 상해 한인청년당에 가입하여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32년 김구 선생의 지령을 받고 황해도 신천에 도착했고, 유진식과 함께 조선총독 처단 의거 준비를 하던 선생은 평소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수상히 여긴 신천경찰서 경찰에 의해 체포, 취조 중 조선총독 처단 계획이 발각되면서 의거는 불발됐습니다.
선생은 1932년 7월 ‘살인예비, 치안유지법, 총포 화약류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최흥식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각종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다 중국 망명을 결심했습니다.
상해 도착 후, 윤봉길 의사가 취직했던 종품공사에서 근무하던 중, 한인애국단 숙소를 사용하면서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선생은 김구 선생의 지령을 받고, 1932년 5월 26일 리튼(Lytton) 조사단 일행이 대련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확인, 대련으로 나오는 관동군 사령관과 남만주철도 총재를 유상근과 함께 처단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선생이 대련의거 준비 과정에서 중국 상해로 보낸 전보를 상하이 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 의심하여 관동청에 발신인 체포를 요청하면서 거사일 이틀 전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 의거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선생은 대련법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 받고,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안경근 선생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이덕주 선생은 1990년, 최흥식 선생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습니다.
/제공=서부보훈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