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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칼럼

칼럼-한강이 온다(2)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입력 2025.04.24 16:33 수정 2025.04.24 16:33



김숙
전)중등학교장

나는 한강 작가를 직접 본 적이 없다. 미디어에 나오는 한강을 본 게 다다. 영상으로 본 그녀의 표정은 담담하고 은근하다. 목소리는 대체로 나직하다. 어떨 때는 갈대피리에서 나는 바람 소리가 살짝 섞인 듯도 하다. 그녀가 만들고 부른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처럼 대화도 가만가만 한다. 절제된 듯한 여린 소리가 살그머니 크레센도 되는가 싶다가 데크레센도 되기를 반복한다. 어절 끝을 놓치지 않으려면 귀를 기울여야 한다. 빙산의 일각을 보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작가의 이야기는 묘하게 그의 작품들처럼 시청자를 끌어당긴다. 언어의 연금술사거나 문학의 신에 씐 것처럼 신비롭다.

내가 처음 놀라고 끌린 작품은 《흰》 이였다. 흰색 이미지들로만 어떻게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세 장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서정의 품이 넓다. 시 같기도 하고 산문 같기도 하며 짤막한 에피소드 중심이기도 하다. 한강의 작품 중에 비교적 덜 고통스럽게 접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해서 좋았는지도 모른다. 배경은 작가가 체류한 적 있는 폴란드의 바르샤바이다. 이 도시는 나치로부터 철저히 파괴되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광주와 비슷한 정서가 있는 곳이다. 눈, 흰옷, 흰 꽃, 흰 종이, 우유, 달빛 등의 사물을 불러와 흰색이라는 키워드로 생명과 죽음, 상실, 기억, 그리고 슬픔을 이야기한다. 흰색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탐구한다.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는 읽다가 보류하였다. 존재감 없이 폭력에 노출되는 영혜의 처지에 분노가 치밀어 문학적인 내공과 근육이 축적되면 다시 읽겠노라고.

《소년이 온다》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현장이 배경이다. 15살 소년 동호가 사건의 중심에 서있다. 군인의 총에 맞아 죽은 친구 정대를 찾아 시체 안치소에서 시신 관리 자원봉사를 하는데 결국 동호도 살해당한다. 현장에 있다 무참히 죽은 소년 동호는 민주화 운동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사람을 대변한다.

이 소설은 쇳소리와 핏자국에 정면으로 부닥치는 건 아니지만 그 흔적이 남긴 역사적 상처와 인간의 고통, 우리의 아픔이 담겼다. 동호의 시점과 주변 인물의 시점을 통해 사건의 잔혹성과 살아남은 자들의 후유증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치유는커녕 고통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연대만이 사회적 치유와 회복이 가능함을 말해준다. 이런 역사적 사건을 잊으면 언제든지 5·18 같은 사태가 다시 올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 같기도 하다.

2021년 한 방송사의 인터뷰에서 소설가 한강은 《소년이 온다》를 쓸 때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이 고통이었다고 진술한다. 그 압도적인 고통에 소설을 쓰는 동안 거의 매일 울었단다. 사실 그 고통의 울음 속으로 독자도 끌어당긴다. “비가 올 것 같아.”라는 첫 문장부터 심상치 않다. 국가가 개인에게 아니 민중에게 가한 폭력을 많은 국민은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다. 권력 유지를 위해 외면하거나 왜곡하는 현실을 증언하고 고발하는 데 독자는 깊이 공감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소년이 온다》 추천사에서 “한강이 쓴 광주 이야기라면 읽는 쪽에서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고 각오한 사람조차 휘청거리게 만든다. (…) 시적 초혼과 산문적 증언을 동시에 감행하는, 파울 첼란과 쁘리모 레비가 함께 쓴 것 같은 문장들은 거의 원망스러울 만큼 정확한 표현으로 읽는 이를 고통스럽게 한다.”라고 언급했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역사적 폭력과 상처, 그리고 그 기억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것의 중요성을 깊이 탐구했다. 나약한 개인의 서사와 국가의 역사가 얽힌 점이 강렬하다.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라고 시작하는데 그 몽환적이고 난해함이 독자를 한동안 눈보라 속에 헤매게 한다.

주인공 인선은 작업 중에 중지를 다쳤는데 수술로 봉합한 자리를 바늘로 찔러 피를 내는 장면이 있다. 피가 멈추면 신경이 손상되어 기능할 수 없으니 3분마다 바늘로 쑤셔서 피가 나게 한다. 이는 우리 역사의 악몽을 작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경각심 같기도 하다. 작가는 이렇게 쓸 때 얼마나 아팠을지. 4.3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통증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한편으로 이런 지점이 너무 강렬해서 회피하고 싶기도 하지만 한강 작가는 독자도 기어이 진실과 고통에 동참하게 한다.

세간은 말한다. 《채식주의자》는 개인과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다뤘다면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는 국가가 개인 또는 민중에게 가하는 폭력을 나타낸다. 하지만 국가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진정성을 가로막고 미해결 과제로 국민에게 고구마 먹고 체한 가슴을 안긴다.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이 작가에게 영광이라면 고구마 먹고 체한 가슴을 부둥켜안고 사는 우리 국민은 뻥 뚫리는 소화제를 처방받았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점은 세상이 약자의 진정성을 인정했다는 지점이다. 번역본이 아닌 모국어로 노벨상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일이 꿈같다. 한 지인은 어떻게 외국어로 번역했는지 역으로 영어 번역본까지 주문했노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나는 놀람과 감동에 설레다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일기 삼아 글 한 편을 얹는다. 모두 다 아는 사건이어도 내가 기억하고 기록하며 증언하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예전에는 국문학과나 문과 계통을 전공한다면 굶을 과라거나 굶어 죽기 딱 좋은 과라고 비아냥대기도 했다. 이제 문과생들이 당당히 기를 펴고 노벨문학상 받으려고 문과에 입학했다,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이도 보았다.

음악회를 마치고 100개의 문자를 확인했다는 지인은 그날 밤, 다섯 명의 동호인과 열아홉 병의 ‘새로’라는 소주와 함께 한강에 빠졌노라고 고백했다. 소주 이름에 ‘새롭다’라는 의미를 부여해 가며. 날이 갈수록 제2, 제3의 새로운 한강이 우리 곁으로 온다고 예고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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