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봉 시인 / 수필가
대한민국은 쇼핑 천국이다. 인터넷 창을 열고 주문만 하면 새벽에 문 앞에 벌써 와 있다. 당일 배송이 새벽 배송으로, 이제는 로켓 배송의 시대란다. 포장을 열자 아동용 세발자전거가 미조립 부품으로 들어 있다. 아마도 아내가 네 살배기 손주용 자전거를 구매한 모양이다. 사용 설명서를 순서대로 천천히 꼼꼼하게 읽어 본다. 코미디 같은 지난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습관처럼 실천하고 있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낮에 가지치기를 마치고 먼지도 씻어 내고 피로를 풀어 볼 겸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는 중이었다. 옆구리에 쌓여 있던 묵은 때가 손바닥에 묻어 나오고 있었다. 손이 잘 닿지 않는 등짝에서도 끈적끈적한 땀과 함께 지우개 배설물 같은 잿빛 때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손이 닿지 않는 등짝이 근질거리고 스멀스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손이라도 닿으면 박박 손톱으로 긁어 보면 좋겠는데, 언제부터인지 어깨가 고장 나면서 아내의 손길을 빌리거나 긴 목욕 수건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늘 걸려 있던 목욕 수건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아내도 출장 중이라 다른 방안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가 샤워기 아래 걸어 둔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주걱 같기도 하고 등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효자손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평소 사용해 본 적이 없던 터라, “옳다! 이거였구나.” 하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샤워할 때 가려운 등도 긁어 주고 손이 닿지 않는 부위의 때도 밀어 줄 수 있는 물건이다 하며, “참! 아이디어도 좋구나.”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등이며 옆구리며 가려운 곳을 마구 긁고 밀기 시작했다. 살살 밀어도 그리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피곤함에 지친 나머지 곧바로 잠자리에 떨어지고 말았다.
다음 날 건지산 아침 산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욕조에 뜨끈한 온수를 받아 몸을 담그는 순간이었다. 평소 못지않게 등이 물에 닿자마자 참기 어려운 쓰라림과 뜨거움이 덮쳐 왔다.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조금 더 참으면 괜찮겠지 하며 참고, 살갗이 스스로 적응하기를 두고 보기로 했다. 짐작대로 점차 감각이 둔해지더니 쓰라림도 통증도 무디어지고 살갗도 잘 적응하고 있었다.
욕조에서 나와 보니 옆구리가 붉게 상기되어 있고 손톱 자국이 스친 것 같은 상처가 보였으나, 가려워서 저도 모르게 긁었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고 말았다. 등짝이야 물론 눈에 보이지 않으니 예기치 못한 불상사를 아예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들통은 저녁 잠자리에서였다. 평소 좋아하던 뜨끈한 전기장판에 등을 대고 눈을 붙이고자 누웠는데, 등짝이 아리고 쓰려서 잠을 청할 수가 없는 것이다. 최대한 손을 뻗어 닿는 부위를 만져 보니 살갗이 약간 부풀어 있고 까슬거림도 느껴졌다. 게다가 가렵기까지 했다.
그제야 혼자 이런저런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두드러기일까? 아니면 피부병이라도 생긴 걸까? 생각 끝에 일단은 손이 닿는 부위에만 가려움과 아토피에 바르는 연고를 손에 찍어 일부분에만 시험해 보기로 했다. 혹시 모를 부작용이 염려되어 적용 부위의 반응을 지켜보고 판단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오후 늦게 손주 보러 갔던 아내가 돌아왔다. 결국은 아내에게 원인과 판단을 받아 보기로 하고 등을 내보였다. 등을 본 순간 아내가 “으~으~ 이거 왜 이래?” 하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었다. 채칼이 스친 듯 등이고 옆구리고 상처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제 막 딱지가 앉기 시작했다며 가렵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왜 그러냐고 묻는데 나도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다만 그제 저녁에 뜨끈한 물로 샤워를 했을 뿐이고, 등이 가렵고 때가 일어서 때밀이 주걱으로 등과 옆구리를 좀 밀었을 뿐이라고 했다.
아내는 때밀이 주걱이 어디 있느냐며 그거 한번 보자고 했다. 아내도 ‘때밀이 주걱’이란 말에 귀가 솔깃한 모양이었다. 욕실로 가서 등을 밀었던 주걱 같은 손잡이를 보이자 아내가 기겁했다. 그건 때밀이 주걱이 아니고 발바닥 굳은살을 제거하는 각질 제거용이라는 것이었다. 만져 보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표면이 까끌까끌한 금속 재질의 사포로 덧씌워져 있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사포로 된 각질 제거용으로 살갗을 문질렀으니 온전했겠는가? 아내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상처 연고를 바르고야 비로소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10년 전 친구의 별장에서 병따개가 없다고 부엌칼 손잡이로 맥주병을 따다가 뚜껑이 아닌 유리 목이 잘리는 바람에 손가락을 심하게 다친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물건이나 도구의 용도가 제각각 정해져 있는데, 제대로 알고서 사용해야 한다.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속담에 ‘접싯물에 빠져 죽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 일 후로는 새로운 물건을 다룰 때 반드시 사용 설명서를 꼼꼼하게 읽어 보고 그 순서에 따르는 습관이 생겼다. 하찮은 물건도 제 용도에 맞게 바르게 쓰지 않으면 흉기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사용 설명서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