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김제소방서 대응예방과장
멀리서 치솟는 검은 연기가 보인다. 119 소방차가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차량들이 하나둘 양쪽으로 비켜선다. 정체돼 있던 도로가 마치 거짓말처럼 뚫리며 소방차는 막힘없이 사고 현장으로 달려간다. 일명 ‘도로 위 모세의 기적’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지난 7일 오후 3시 46분 김제시 금산면 호남고속도로 상행선 금산사 나들목 1km 지점에서 승용차와 화물차 등 4대가 연쇄 추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충격으로 차량에 타고 있던 3명이 부상을 입었고, 뒤엉킨 차량에서는 곧바로 불길이 치솟았다. 사고 현장은 119안전센터와 약 4.5km 떨어져 있었지만, 사고 여파로 고속도로는 순식간에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했다. 그러나 운전자들은 하나같이 차량을 도로 양쪽으로 질서 있게 비켜 세워 소방차의 출동로를 열어 주었다. 덕분에 소방차는 지체 없이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고, 자칫 대형 화재로 번질뻔한 불길은 25분 만에 완전히 진화됐다. 성숙한 시민들의 자발적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화재·구조·구급 현장에서 골든타임 확보는 곧 생명과 직결된다. 화재 현장의 5분은 초기진화와 대형 화재를 가르는 분수령이며, 응급환자에게 5분은 생사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시간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1분이지만, 사고를 당한 당사자에게는 그 1분이 너무도 소중하다. 오늘 내가 긴급자동차에 비켜준 단 몇 분, 몇 초의 시간이 내일은 내 가족과 이웃의 생명을 살리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이유로 긴급자동차에 대한 양보 의무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소방기본법」에 따르면 화재 진압이나 구조·구급을 위해 출동하는 소방차에 진로를 양보하지 않거나, 끼어들기·가로막기 등으로 출동을 방해할 경우 과태료 100만 원이 부과된다. 또한 골목길의 불법 주정차 역시 신속한 출동을 가로막는 주요 요인이다. 실제 화재 현장에서는 불법 주정차 차량을 강제처분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차량이 파손되더라도 보상 대상에서 제외된다. 결국 법규 위반은 자신의 재산뿐 아니라 이웃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도로 위 모세의 기적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숙한 시민의식은 법보다 앞서야 한다. 법은 최소한의 의무만을 규정할 뿐, 재난을 막아내는 진정한 힘은 결국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자발적인 실천에서 나온다. 오늘 내가 비켜준 길이 내일은 나와 내 가족의 생명을 지키는 길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