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아침 문을 연다. 달빛이 새벽잠을 털어내고 있는 능선을 향해 발걸음을 밀어 올린다. 기분 좋은 산바람이 새소리를 실어 온다.
자박자박 물길을 거슬러 산길을 오른다. 맑은 아침으로 샤워한 숲이 향긋하다. 풀잎에 맺힌 투명한 몸을 기울면 금방이라도 주르르 흘러 내릴 것 같다. 오감이 열리고 생각이 맑아진다. 숨소리 하나 흔들리지 않는 고요가 이어진다.
골골이 이어진 물길을 따라 구비 진 골짜기를 오른다. 발자국 뒤꿈치를 따라오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가파른 오르막의 시작이다.
가쁘게 몰아 쉬던 골 물의 숨소리도 작아진다. 졸졸거리며 나지막이읊조리는 물소리가 산 중턱임을 말해준다. 능선을 따라서 가지처럼 하루하루가 기적이다.
내리뻗은 골짜기기마다 백 살이 넘었을 소나무가 빼곡하다. 기원을 알 수 없는 숲의 연대기, 세월의 무게를 못 이겨 생을 마친 고목이 몸을 가누지 못해 숨을 멈추고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누워 있다. 둥치를 드러낸 늙은 몸이 하늘을 향해 키를 내는 여린 자식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조금만 오르면 능선이다. 산의 등뼈 산맥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너른 품을 열어 크고 작은 봉우리를 내고 산자락을 품는다. 그리고는 골마다 물길을 내고 강에 이르기까지 아래 있는 뭇 생명을 먹이고 입힌다. 숲을 만들어 새와 짐승을 들였다. 그의 품은 늘 조용하지만 역동적이다.
가쁜 숨이 목까지 차오른다. 코를 땅에 박고 두더지처럼 경사를 오른다. 하늘이 환해진다. 시야가 트이고 있다. 좌우로 길게 능선이 펼쳐진다. 푸른 녹음에 칠월의 능선이 푹 파묻혀 있다. 잠에서 깨어난 안개가 산을 오르더니 능선을 하얗게 적신다. 목화솜을 타듯 구름이 차오른다. 먼 산이 자궁을 열고 황금알을 쑥 밀어 올린다. 붉게 물든 하늘빛이 능선에 번진다. 산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웅장하고 엄숙하다. 침묵 속에 장엄한 아침을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아본다. 능선을 넘어온 바람은 고비를 넘었다는 듯 더 날개를 단다. 산이 동안거에 들 때도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으로 마른 귓전을 때렸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능선에 터를 잡은 것들은 죄다 키가 작다. 몸집은 작지만, 몸피는 단단하고 야무지다. 내공으로 말하면 아랫녘 키 큰 잣나무나 오리나무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능선의 굽이를 돌아 나올 때마다 높은 봉우리가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조금만 더 가면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향적봉이다. 머리맡에 인파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정상이다. 사진을 찍는 사람, 운무를 즐기는 사람, 긴 호흡을 가다듬는 사람, 허기를 메우는 사람 각양각색이다. 서로 다른 곳에서 하나의 목적지를 향하여 정상에 모인 사람들, 곧 흩어질 것이다. 인연을 스친 사람들이 하나둘 산을 내려간다.
인연이 머물다 간 자리에 무거워진 어깨를 내려놓는다. 멀리 겹겹이 어깨를 맞댄 산들이 한 폭의 수묵화로 걸려 있다. 턱 밑에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이름을 지닌 주목이 전설처럼 선 채로 생을 마쳤다.
마른 뼈로 남았지만, 아직 등뼈 꼿꼿하다. 천 년의 기상을 담고 있는 너, 내색 없는 큰 산의 속내를 다 알고 있으려나.
정상을 만날 또 다른 인연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준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내려가는 길은 훨씬 수월하다. 여유가 생겼다. 오를 때는 정상을 향해 앞만 보고 걸었다. 지금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산에서 내려간다. 몇 걸음 내려서니 평전이 눈 앞에 펼쳐진다. 평전은 꽃을 내고 축제 중이다. 노란 꽃등을 밝히고 있는 각시원추리가 첫눈에 들어온다. 꽃말이 기다리는 마음이란다. 나를 스쳐 간 모든 인연을 해마다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 마음을 가진 꽃이 애틋하다. 그리움이 수줍게 숨어 있다. 꿩의 다리도 눈에 띈다.
하얀 화관을 쓰고 긴 다리를 가진 꿩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하다. 연초록 여름을 몸에 두른 박새 꽃도 보인다. 이름이 모두 독특하다. 다시 꽃을 보니 꽃말이 고고하기까지 하다. 등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천천히 해찰하듯 내려간다. 오를 때 보지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느낌이 더 새롭다.
서편 하늘에 노을이 번지고 있다. 목표를 두지 않고 사는 것, 어떠할까? 아마도 욕심과 부러움은 없을 것 같다. 그리할 수 있다면 매일의 발걸음이 한결 더 가벼울 것 같다. 목표를 향하여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던 젊은 날이 있었다. 이제는 반환점을 돌아 원점으로 회귀하는 시간, 하산길의 다짐처럼 목표 따윈 없어도 되겠다. 남겨진 여분의 행로가 지금처럼 가벼움이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