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귀선
시인
나는 지금 외롭습니다. 한때는 잘나갔지요. 연예인이거나 대 기업의 간부 부럽지 않은 인기가 있었어요. 내가 필요해서 줄을 지어 서 있을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것은 단순히 인기에 의한 것 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예를 들면 술에 취한 사람이 나를 발로 차며 행패를 부릴 때도 그저 바라만 보 고 있거나, 엄청난 욕지기 때문에 귀가 먹먹해도 그저 묵묵히 있 었어요.
하지만 그런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비 오는 날 내 안으 로 들어온 사람의 젖은 등을 바라보는 일은 내 안의 측은지심을 발동하기도 하였고, 달빛을 받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밀어를 듣는 것은 한밤의 낙이었답니다.
내 곁에서 이루어지는 숱한 이야기들. 어떤 이는 봄볕보다 포 근한 말로 내 귀를 따습게 하였고, 어떤 이는 묵묵히 이별을 들 으며 속울음을 억누르며 서 있었습니다. 눈물을 애써 참는 사람 을 본 날은 나는 한잠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도 행색 이 남루한 사람이 내 곁으로 다가오면 나는 긴장을 하곤 했습 니다. 때로는 대리운전기사가 추위를 피해 뛰어 들어오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바람을 막아주는 일뿐이었습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보살피는 사람이 자주 왔었고, 그들은 나를 보물처럼 어루만지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유명한 영화의 한 장면에 픽업되어 낭만을 흩뿌리기도 했습니다. 청춘 남녀의 매개로 등장하기도 하였고, 쓸쓸한 거리의 한 장면으로 오버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영화의 한 장면은 아니더라도 얼마 전 가슴 떨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드문드문 내리는 눈발이 가로등에 선명한 밤이었습니다. 30 대쯤의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지요, 그녀의 걸음에는 취기가 묻 어있는 듯했습니다. 비틀거리며 그녀는 내 공간으로 들어왔습 니다. 짐작한 대로 그녀 입에서는 술 냄새가 났습니다. 그녀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가방에 손을 넣었습니다. 비틀거리며 한참을 더듬던 손에는 동전이 들려 있었어요. 그녀 는 희미한 불빛으로 그 동전을 한동안 바라만 보다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나갔습니다.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이상하다는 생각보다는 외로움이 엄습해왔습니다. 나 역시 할 말이 많지만 말 못 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들리는 자동차 엔진 소리마저 멀어지는 거리. 겨울은 내 몸을 휘감았습니다. 그렇게 매섭던 바람도 깃들고 별들도 조는 새벽, 초췌한 그림자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가까워 질수록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 같았습니다. 조금 전 동전을 만 지작거리다 돌아선 여자였습니다. 어디를 헤매다 왔는지 아까 보다 더 취한 것 같습니다. 그 여자의 손에 들린 핸드백이 보도 블록에 끌리며 마치 흐느끼는 소리처럼 소리를 냅니다. 흐트러 진 머리카락이 무거워 보입니다. 나는 숨을 죽입니다. 비틀거리 던 그녀가 나에게 기댑니다. 나는 그녀로부터 온기를 느낍니다. 한숨이 점점 크게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어깨를 들썩입니다. 머 리를 훔쳐 올리는 그녀의 눈이 벌겋습니다. 아이라인이 눈물에 범벅이 되어 엉망입니다. 입술에 바른 루주도 목소리만큼이나 일그러져 있습니다.
갸름한 얼굴에 눈이 깊은 그녀는 눈물을 삼키더니 동전을 찾습니다. 주머니에서 꺼낸 동전을 아까와는 달리 지체 없이 투입 구에 넣습니다. 나는 그녀의 사연이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눈 물을 그치게 해줄 마음으로 그녀가 누른 번호로 열심히 신호를 보냅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새벽의 적요를 가릅니다. 이윽고 남 자의 목소리가 급하게 들려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당신이야?”
그녀는 남편인 듯한 남자의 질문을 무시한 채 수화기를 내려 놓습니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어릴 적 우물에 돌멩이를 던졌 을 때보다 더 크게 들립니다. 그녀는 다시 수화기를 듭니다. 누 르는 번호가 다릅니다. 이번에는 나이 든 여자 목소리가 수화기 를 통해 들려옵니다. 그녀는 언제 울었느냐는 듯 밝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엄마, 나야.”
두 마디의 짧은 목소리이지만 부스 안이 갑자기 훈훈해집니 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머니의 지청구가 흘러나옵니다. 하루 라도 빨리 용서를 구하고 아이들과 남편에게 돌아가라는 말에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그녀는 아들의 이름 을 부릅니다. 그리곤 참았던 눈물을 쏟아냅니다. 딸의 울음소리 를 들어야 하는 어머니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어머니도 울고 맙니다. 나도 울먹입니다. 그녀의 눈물이 잦아들 때쯤 어머니의 목소리가 새벽을 가릅니다. 한 번은 겪어야 할 일 이니 사위를 만나라는 것과 죽을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내용 입니다.
나는 이런 사연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어떡 합니까. 사는 게 다 그런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요, 이렇듯 세 상 고민을 들어주고 소통을 돕는 우리가 점점 외면받아 이제는 가물에 콩 나듯 찾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오면 언젠가는 가야 하는 게 사람이나 우리의 처지나 마찬가지일 것인데 너무 빠른 변화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쯤 되면 제가 누구인지 눈치챘겠지요? 그래요, 저는 공중 전화예요. 수필이 경험을 토대로 진솔하게 쓰는 장르인데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하진 마세요. 공중전화의 생각이 지만, 그것은 내가 바라본 시각이기도 하니까요. 살아가면서 누 군가에게 공중전화 같은 입장이 되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